박춘태 재외기자
박춘태 재외기자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쓰러질 수 있다. 생각하지 못한 사고, 병, 실직, 노년, 장애… 자신이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왔다 해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인생의 F학점’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회는, 공동체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안전망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전망을 단순한 ‘공짜’나 ‘무임승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한 경제학 교수가 대학 강의실에서 실험을 제안했다. 학생들의 시험 점수를 모두 더해 평균점수로 나눠 모두에게 똑같이 주겠다고 했다. 결과는 모두가 F. 학생들의 표정엔 분노와 체념이 가득했다. “이래선 누구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 이 실험은 ‘평등분배의 실패’를 강조하는 우화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이 우화는 중요한 현실 하나를 말하지 않는다. 바로 뉴질랜드 복지제도 속에 살아있는 ‘공동체적 신뢰’다.

뉴질랜드는 오래전부터 “No one left behind”, 즉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다”는 가치를 국가의 중심에 두고 정책을 운영해왔다. 질병, 실직, 장애, 노년 등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삶의 경계 앞에서,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장치를 갖추어 왔다. 정부는 매년 4월마다 물가와 임금상승률을 고려해 연금, 장애수당, 육아지원금 등을 자동으로 조정한다. 2025년 4월에도 마찬가지로 전 국민 대상 복지급여가 올랐다.

그 대상은 단지 극빈층만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실직자, 파트타임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이주민, 장애인, 중산층 가정까지, 그 복지는 폭넓게 작동한다. 어린이집 보조금, 병원비를 줄여주는 Community Services Card, 주거·식비·의료비 긴급지원. 예를 들어, 치료비와 교통비가 급증하는 장애 가정을 위한 지원은 단지 “가난한 극소수에게 주는 시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하는 비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사람은 묻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돈을 주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뉴질랜드 국민들에게 복지는 “국가가 나를 위해 존재하듯, 나도 국가를 위해 기여한다”는 상호신뢰 위에 서 있다.

코로나19 사태 당시 뉴질랜드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임금보조, 긴급생활비 지급을 단숨에 결정했다.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복지 신청기준을 완화했고, 서류 절차를 간소화했다. 2025년 현재도 실업률과 복지 수급자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정부는 혜택을 줄이는 대신 도리어 “더 많은 이들이 기초 생활을 지킬 수 있도록” 소득기준을 넓혔다.

물론 복지가 개인의 동기를 약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일하지 않아도 돈 받으면 게을러지지 않겠느냐”는 비판은 그 경제학 교수의 주장과 연결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애초에 노력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회라면, 개인의 책임만을 말할 수 있을까?

뉴질랜드의 여러 연구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커질수록 범죄율, 정신건강 문제, 사회적 신뢰의 붕괴가 함께 증가한다고 밝힌다. 반대로 기본적인 복지가 유지될 때 더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고, 장애를 가진 어른들도 스스로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로토루아에 사는 62세 남성은 "장애수당 덕분에 꾸준히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다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말한다. 복지는 그의 삶을 '평균치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다.

만약 그 경제학 교수의 실험이 뉴질랜드에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가 F를 받았을 때 학생들은 “이제 공부 안 할래”라고 말하며 포기했을까? 아니면 누군가는 "그럼 우리 중 누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를 먼저 떠올리지 않았을까. 뉴질랜드 청소년, 부모, 노인, 장애인, 이민자, 누구든 복지를 통해 경험하는 감정은 단순한 '혜택'이 아니다. “언젠가 내가 어려울 때, 사회가 내 손을 잡아줄 것”이라는 신뢰다.

완벽한 제도는 없다. 뉴질랜드 복지제도도 때론 엉성하고 불평등한 요소가 있다. 하지만 이 나라가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복지는 누군가의 노력과 성취를 빼앗는 평균의 덫이 아니라,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기회’를 만드는 투자라는 것. 결국 “사람이 사람을 지키는 나라”를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에는 각자의 F학점 순간이 온다. 하지만 문제는 점수가 아니라, 그 순간 내가 혼자인지 아닌지이다. 뉴질랜드 복지의 진짜 힘은 ‘공짜 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인생의 벼랑 앞에 서 있을 때, 공동체가 등을 지지해주는 문화와 구조, 그것이 바로 복지다. 결국, 누군가에게 평등하게 베푼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F학점이 아니다. 사회가 신뢰를 잃고 각자도생의 길로 흩어질 때다. 뉴질랜드는 불완전하더라도 오늘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금을 내고, 정책을 만들고, 서로를 바라본다. 그래서 이 나라는 '복지국가'라는 말보다 '공동체 국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우리가 베푸는 복지는 곧 우리가 되찾는 사회적 신뢰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누군가의 삶을 살리고, 나의 미래를 지킨다. “사람이 사람을 지키는 나라.” 그 길을 뉴질랜드는 지금도 묵묵히 걷고 있다.

 

글쓴이: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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