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7월이 찾아왔지만, 한반도의 여름 하늘은 믿기 힘들 만큼 맑았다. 장마가 시작됐다는 기상청의 발표가 무색하게, 비는 오지 않고 폭염과 열대야만이 도시와 들판을 달구고 있었다. “장마가 벌써 끝난 건가요?”라는 농담 섞인 질문이 진담처럼 들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우리가 잃어버린 계절, 그리고 그 계절이 남긴 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장마.
한반도에 사는 이들에게 장마란 단순한 비의 계절이 아니었다. 북태평양고기압과 대륙고기압이 힘겨루기를 하며 만들어낸 정체전선 위로, 굵은 빗줄기가 며칠이고 쏟아졌다. 그 비는 논밭을 적시고, 강을 채우고,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촉촉이 적셔주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리는 불편함을 투덜대면서도 어딘가 안도했다. 이 비가 있어야만 여름 가뭄을 이겨내고, 가을의 풍요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장마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정체전선은 남한이 아닌 북한 상공에 머물고, 남쪽은 마치 사막처럼 뜨거운 열기와 메마른 바람만이 맴돈다. 북태평양고기압이 과거보다 더 강해지고, 대기 상층의 티베트 고기압까지 힘을 보태며, 장마의 계절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제는 “장마가 끝났느냐”가 아니라, “장마란 게 아직 존재하느냐”를 묻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계절의 리듬은 흐트러지고, 익숙했던 자연의 순환이 낯설게 변하고 있다. 한반도의 여름은 더 뜨겁고, 더 건조해졌다. 장마가 오지 않으면 농작물은 타들어가고, 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낸다.
이제 우리는 ‘물의 계절’이 언제 올지, 혹은 다시 올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변화 앞에서,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당황하고, 비가 오지 않는 날들을 불안하게 세며,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는 ‘비가 오길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배워야 할 때다.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 역시 기후위기의 예외는 아니다. 최근 몇 년, 뉴질랜드의 노스랜드와 오클랜드 지역에는 몇 달씩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 이어졌다. 수돗물 공급이 제한되고, 급수차가 동원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곳의 대응은 조용하면서도 단단하다.
뉴질랜드는 물을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공동체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으로 바라본다.
오클랜드에서는 ‘Level 1 water restriction’이라는 단계적 제한이 시행된다. 잔디에 물을 주는 시간, 차량 세차, 심지어 샤워 시간까지 세심하게 제한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조치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한다는 점이다.
‘물은 모두의 것’이라는 인식이, 이곳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또한 뉴질랜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Three Waters Reform’라는 대규모 물 인프라 개혁을 추진한다. 식수, 하수, 빗물의 통합 관리를 통해, 기후변화로 인한 급격한 수급 변동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특히 마오리의 전통 지식과 공동체 관점을 정책에 반영해, 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존중하는 접근은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과 뉴질랜드, 두 나라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후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한국은 사라지는 장마와 예측불가한 폭염에 놀라며, 혼란 속에서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반면 뉴질랜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기후위기’를 전제로 한 물 관리 체계로 전환하고, 시민과 공동체가 함께 행동하는 문화를 만들어왔다.
한국의 장마는 더 이상 달력 위의 고정된 계절이 아니다. 기상청의 ‘애매한 상황’이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이제 불확실성 속에서 분명한 준비와 태도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비가 오면 짜증부터 났던 시절이 있었다. 장맛비가 외출을 방해하고, 빨래를 마르지 않게 만들던 그날들이 이제는 그립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비’와 ‘물’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이제, 장맛비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마른 땅에 내리는 첫 빗방울은, 어쩌면 ‘기적’이 될지도 모른다.
뉴질랜드의 조용한 물 절약 캠페인처럼, 한국에서도 ‘물이 귀한 시대’를 인정하고, 생활 속 습관과 인식을 바꿔야 할 때다.
우리는 폭염과 열대야를 견디는 법도 배워야 하지만, 무엇보다 ‘물과 더불어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계절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물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나요?”
*박춘태(교육학 박사) 재외기자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