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대형 마트인 파컨세이브를 둘러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잘 정리된 식품 코너 한쪽, 낯익은 라벨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김치였다. 수많은 외국 식품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던 그 붉은빛은 고향의 맛, 그리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김치를 마주한 순간, 필자는 마치 먼 길을 돌아 다시 집 앞 마트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졌다.
김치는 단순한 발효식품을 넘어 한국인의 삶과 문화, 그리고 정신을 응축해 놓은 음식이다. 밥상 위에 김치가 없으면 왠지 허전하고, 김치찌개나 볶음김치로 변주될 때마다 새로운 맛을 선사하며, 때로는 그 매운맛이 인생의 고단함을 달래주기도 한다. 그런 김치를 지구 반대편의 마트에서 만난 순간은 단순한 ‘발견’을 넘어, ‘연결’이라는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최근 들어 K-food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K-pop, K-drama가 문화적 파급력을 넓히는 동안, 김치와 불고기, 비빔밥 같은 전통 음식들이 자연스럽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특히 김치는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으며 ‘슈퍼푸드’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 유산균은 장 건강에 도움을 주고, 풍부한 채소 재료는 균형 잡힌 영양을 제공한다.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동시에 치유해주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세계인의 관심은 더 커지고 있다.
뉴질랜드 역시 예외가 아니다. 건강과 웰빙을 중시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김치는 단순한 외국 음식이 아니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특별한 존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파컨세이브 진열대에 당당히 놓인 김치가 그 증거다. 이제 김치는 한국인의 밥상에서만 존재하는 음식이 아니라, 지구촌이 함께 즐기는 음식으로 성장했다.
며칠 전 탁구장에서 독일 출신의 한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라켓을 잡고 땀을 흘리던 그는 대화 중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나, 얼마 전에 한국 가게에서 김치를 샀어. 매콤한데 묘하게 중독되더라.” 순간 필자는 놀람과 동시에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독일에서 온 친구가 스스로 찾아 구입하고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점 그 매력에 빠지고 있다며 웃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필자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김치는 이제 한국인의 고유한 음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조차 기꺼이 즐기고, 자신의 식탁에 올리는 세계인의 음식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를 소개하게 된다.
김치를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타국 생활에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그리움은 음식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현지 음식에 익숙해진다 해도, 마음 깊숙이 자리한 고향의 맛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김치 한 조각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하고,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먹던 저녁상을 기억하게 한다.
해외에서 김치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정체성의 상징이며, 이방인의 삶을 버티게 해주는 정신적 지주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자부심이 되살아나고, 동시에 그 맛은 지친 하루를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 된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만난 김치는 필자에게 바로 그런 감동을 선사했다.
음식은 언어보다도 빠르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 독일 친구가 김치를 사서 먹고 그 경험을 나와 나누듯, 음식은 자연스레 대화의 문을 연다. 처음에는 낯설어 고개를 젓던 이들도 매운맛의 매력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다. 매운맛에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웃음을 짓는 모습 속에는 문화가 스며드는 특별한 순간이 담겨 있다.
김치는 단순한 발효 채소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과 삶의 지혜가 담긴 결과물이다. 그 김치를 뉴질랜드 사람들이 맛보며 이해하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한국을 알리는 통로가 된다. 언어와 국경을 넘어 음식이 전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화 교류의 시작일 것이다.
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고, 발효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깊은 맛이 완성된다. 이 과정은 한국인의 삶의 태도와 닮아 있다. 성급하지 않게 기다리며, 공동체 안에서 나누고, 시간이 흐르며 더욱 깊어지는 맛을 존중하는 태도. 김치는 단순히 입맛을 돋우는 반찬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철학을 담고 있다.
뉴질랜드 사람들도 아마 이 철학을 음식 속에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인스턴트가 아닌,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발효의 맛. 그것은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느림의 미학’을 다시 일깨워준다. 김치는 그렇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삶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필자는 한동안 파컨세이브의 김치 진열대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향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고, 한국과 뉴질랜드를 잇는 다리가 눈앞에 놓여 있는 듯했다. 김치가 이곳까지 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수출업자, 유통업자, 마트 관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김치를 사랑하는 소비자들. 그 모든 이들의 손길이 모여 오늘의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김치는 단순한 발효 채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과 세계를 잇는 문화의 끈, 그리고 이주민에게는 마음의 고향을 불러일으키는 위로였다. 독일 친구가 기꺼이 즐겨 먹는 그 김치가, 이제는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어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김치는 이제 더 이상 한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인의 음식이 되었고, 동시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살아 있는 대사(大使)가 되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파컨세이브에서 만난 김치 한 통, 그리고 탁구장에서 들은 독일 친구의 고백은 필자에게 한국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김치는, 지구 어디에서든 한국인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해주는 특별한 음식이다. 크라이스트처치의 마트에서 김치를 발견한 감동, 그리고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본 기쁨은 오래도록 필자의 마음속에 남아, 앞으로도 나와 타인의 삶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글쓴이 :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