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재외기자
박춘태 재외기자

도심의 주택가 도로를 달리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하는 장면이 있다. 도로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주차 차량들, 그리고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진 공간. 마침 반대편에서 다른 차량이 다가온다면, 누가 먼저 지나가야 할까.

이 단순한 순간은 사실 한 사회가 지향하는 ‘배려의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뉴질랜드 교통청(Waka Kotahi, NZTA)에 따르면, 도로교통법이나 로드코드에는 “좁은 길에서 누가 먼저 지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대신 운전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상호 배려와 안전이다. 표지판이 없는 좁은 도로에서는 속도를 줄이며 상황을 살피고, 양보해 충돌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법 조항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운전자의 마음가짐’이라는 설명이다.

뉴질랜드 자동차협회(AA) 운전 교육을 하는 한 책임자의 조언은 실생활 속 지혜를 잘 보여준다. “만약 내 차 쪽에 주차된 차량이 늘어서 있다면, 내가 중앙선을 넘어가야 하므로 반대편 차량에 우선권을 주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도로 위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상황을 고려한 ‘양보’가 우선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흔하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의 주택가 골목을 지나갈 때, 주차된 차들 사이로 간신히 빠져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도로 상황이 더 복잡하고 차량 흐름이 빠르다 보니, 순간의 눈치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지기도 한다. 누가 먼저 지나가느냐를 두고 경적이 울리기도 하고, 급히 속도를 내며 상대보다 먼저 빠져나가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결국 좁은 골목에서의 마주침은 종종 긴장과 스트레스를 낳는다.

반면 뉴질랜드의 도로에서는 조금 다른 풍경이 자주 펼쳐진다. 우선권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 만큼, 운전자들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눈빛이나 손짓으로 소통하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풀어간다. 특히 양보를 받았을 때 가볍게 손을 들어 감사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일상처럼 자리 잡았다. 작은 손짓 하나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공기는 도로를 단순한 ‘이동 공간’이 아니라 ‘함께 쓰는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특수한 경우에는 뉴질랜드만의 배려 관습이 이어진다. 예컨대 오르막길에서는 언덕을 오르는 차량에 우선권이 주어진다. 이는 수동변속기 차량이 많던 시절, 경사로에서 출발하기 힘들었던 상황을 고려해 생겨난 관습이다. 지금은 자동변속기가 보편화되었지만, 여전히 그 배려의 원칙은 살아 있다. 또한 시골길이나 비포장도로에서는 서로 좌측 가장자리에 최대한 붙어 서행하며 안전을 우선한다. 1차선 다리의 경우 대부분 우선권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지만, 표지판이 없을 때는 시야가 더 넓게 확보된 차량이 양보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이런 문화는 한국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도로 위의 질서가 철저히 법과 규정에 의해 관리되는 경향이 강하다. 교차로나 회전 교차로에서도 세세한 규정이 적용되고, 신호체계 또한 복잡하다. 이는 교통량이 많은 대도시 환경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법에 정해져 있지 않으면 내 권리”라는 태도가 자리 잡으면서, 배려보다 ‘먼저 가야 한다’는 경쟁 심리가 앞서기도 한다.

뉴질랜드의 도로 풍경을 보면, 그들이 단순히 교통법규를 지키는 수준을 넘어, 사회적 약속을 존중하고 타인의 안전을 우선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좁은 길에서 양보하는 순간은 단순히 차 한 대를 보내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시간을 존중하고,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며, 서로의 하루를 조금 더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행위다.

한국의 운전 문화 속에도 따뜻한 장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서울의 복잡한 도로에서, 혹은 비 오는 날의 좁은 골목에서, 운전자들이 가볍게 손짓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그런 장면이 더 자주, 더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규정이나 신호체계만이 아니라 운전자의 마음속 여유가 필요하다.

뉴질랜드 운전 교육에서는 “12초 앞을 내다보라”는 원칙이 강조된다. 단순히 시야를 넓히라는 기술적인 조언이 아니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고, 지금의 순간만이 아니라 곧 다가올 상황까지 미리 준비하라는 지혜다. 삶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까. 나의 권리와 당장의 이익에만 집착하기보다, 조금 더 멀리 바라보고 양보할 줄 아는 태도가 결국 모두에게 더 안전하고 행복한 길을 열어준다.

좁은 도로에서 마주치는 순간은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한국과 뉴질랜드의 교통 문화는 다르지만,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같다. 도로는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며, 서로의 안전과 시간을 존중하는 작은 배려가 모여 더 큰 평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한국의 도로에서 조금 더 따뜻한 양보의 손짓이 늘어난다면, 도시는 분명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뉴질랜드의 손 인사처럼, 작은 제스처 하나가 사람들의 하루를 바꾸고, 더 나아가 사회의 공기를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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