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담기양(谭其骧)의 중국역사지도집(中国历史地图集) 후한 13주중 유주지도. 유주가 만주를 지나 평안도 황해도까지 들어와 있다. 유주는 기주의 북부를 분리해 설치됐다. 지도상에 표시된 유주속군에 대군과 범양군, 연(광양군)만 원래 유주 소속이었고 나머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은 연나라가 고조선(번조선)으로부터 빼앗아 설치한 연5군이다. 창려 요동 현토 낙랑 대방군은 유주를 분리한 평주 소속이다.[출처= 나무위키]
중국 담기양(谭其骧)의 중국역사지도집(中国历史地图集) 후한 13주중 유주지도. 유주가 만주를 지나 평안도 황해도까지 들어와 있다. 유주는 기주의 북부를 분리해 설치됐다. 지도상에 표시된 유주속군에 대군과 범양군, 연(광양군)만 원래 유주 소속이었고 나머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은 연나라가 고조선(번조선)으로부터 빼앗아 설치한 연5군이다. 창려 요동 현토 낙랑 대방군은 유주를 분리한 평주 소속이다.[출처= 나무위키]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이 지도는 후한의 13주 중에 유주(幽州)의 속군을 표시한 지도인데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그야말로 순 엉터리 지도이다. 유주는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하북성 동북방에 설치되어 지리적으로 한국 고대사,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후한의 유주 11군 가운데 전국시대에 연(燕)나라 이었던 탁군과 광양군, 조(趙)나라가 영유했던 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현토, 낙랑, 대방 등 8군은 원래 조선의 영토에 속했다. 이런 중대한 사실을 모를리 없는 중국학계가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유주 지도가 마치 학계의 공인된 지도처럼 유포되고 한국사의 교육자료로서 활용된다면 눈뜨고 고대사의 소중한 역사강토를 빼앗길 수 있다(지도에 보다시피 이미 다 빼앗기고 말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한사군 재한반도설을 견지하면서 동북공정에 부용하는 한국 사학계가 이에 대한 검증이나 반론도 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리장성을 고무줄처럼 늘려 한반도의 황해도까지 그려넣고 고구려 역사가 중국사의 지방사이고 일부분이라는 주장은 이미 고전에 속한다. 후한의 유주지도는 만주 요령성을 넘어 한반도 서북부까지 중국의 고대 영토이었다는 한국사 침탈의 구체적인 결과믈이다.

영토에 대한 역사적인 연고권 주장은 반드시 현실정치에 반영된다. 2017년 4월 미중정상회담 때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은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트럼프 대통령 면전에서 말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은 삼국통일 시대 이후부터 유교적인 중화질서에 순응했지만 결코 중국의 일부가 된 적은 없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반대로 중국은 한국의 일부이었다.

한족, 혹은 서하족이 중원대륙을 지배한 역사는 주왕조를 비롯해서 한, 당, 송 4개왕조에 지나지 않는다. 중고이래는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이 세운 북위, 요, 금, 원, 청이 중원대륙을 지배했다. 삼황오제 시대와 하,상 상고시대에는 동이로 대표되는 배달 조선민족이 중원의 역사문명시대를 개창했다.

지금도 중국은 만주족이 건설한 청제국이 만들어 놓은 역사상 최대판도 위에서 만주인의 전통의상인 치파오(旗袍)를 입고 만주족이 사용했던 북경어인 만다린을 표준어로 사용하고 청요리를 먹고있다. 중국의 대표요리는 만주족(滿)과 한족(漢)의 최고로 진귀한 요리를 모아놓은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다.

중국은 40여년 전부터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미명아래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범위 안에서 일어난 과거의 모든 민족과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간주하는 역사공정을 추진해 왔다. 그 중에 동북변강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을 완료하고 그 결과물을 세계에 홍보하는 단계에 와 있다.

역사전쟁이 점차 노골화되는 시점에 더이상의 역사침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동을 잃게되면 한국사의 반이 날라가지만 유주를 잃게되면 한국사의 8할이 증발한다. 머지않아 고조선은 중국사이고 단군은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날조할 날도 반드시 닥쳐올 것이다.

유주(幽州)라고 하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요동, 요서, 낙랑, 대방은 한국사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익숙한 지명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살펴 보기로 한다.

1. 기주와 유주

기(冀)는 북방을 의미한다.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 우왕은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황하 안쪽의 하북성과 산서성 지역을 기주(冀州)로 삼았다. 중국인은 우왕이 치수작업을 기주에서 시작했다고 하여 다른 주보다 기주를 중시했다. <상서> 우공(禹貢)편은 우왕의 치수 덕분에 중원으로 들어오는 길이 통하여 구주로 부터 들어오는 공물과 부세에 관하여 기록한 책인데 기주의 지리부터 기록했다.

"도이피복(島夷皮服) 협우갈석(夾右碣石) 입우하(入于河)"

동북에 거주하는 도이들이 가죽옷을 (공물로) 가지고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황하로 들어갔다.

<상서> 우공(禹貢) 기주(冀州)

전한 무제가 기주 동북방의 하북성 중부지역을 분리하여 유주(幽州)를 설치했다. <진서> 지리지 유주(幽州)조에, "주례(周禮)에서 말하기를 ‘동북쪽은 유주(幽州)이다’라고 하였다. 북방을 태음(太隂)이라고 하는 바 고로 유명(幽㝠)이다."고 하였다. 유명(幽㝠)은 그윽하고 어두운 곳이라는 뜻이다. 산서성 기주에는 병주(幷州)를 설치하여 기주는 유주와 병주 3개주로 분리되었으며 후한은 전국을 13주로 나뉘었다.

기주를 쉽게 설명하면 삼국지 소설에 나오는 하북의 원소와 조조가 장악했던 지역이며 대체적으로 황하 이북의 하북성 남부 한단시, 형대시, 형수시, 석가장시 일대의 중원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기주의 치소는 오늘날 석가장시 고읍현(高邑縣)이며 기주자사가 다스렸다. 삼국지의 상산 조자룡의 고향이 지금 석가장시이며, 고대 석가장시의 중심지이었던 정정현(正定县)의 옛 명칭이 상산(常山)이었다. 석가장시는 태행산맥의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보정시 서남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져 있다.

유주는 석가장시 북쪽에 설치되었다. 하북성 중부 보정시, 창주시 일대가 유주이었으며 유주의 북단에는 요서, 요동군이 있고, 옛 위만조선으로 부터 빼앗아 설치한 현토, 낙랑, 대방군은 유주에 소속시켰다. 유주의 외곽에 부여, 고구려와 삼한 예맥계 국가가 있었다. 서두에 소개한 <상서> 우공편에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갈석산이 기주에서 분리된 유주의 보정시 태행산맥 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유주는 고대 연나라의 수도이었던 계현(薊縣)을 치소로 삼고 유주자사를 두었다. 고대 연국(燕國)은 기주의 북쪽 유주에 속했다. 유주 탁군이 <삼국지>에 조조와 대결하던 유비의 고향이다. 기원전 150년경에 한무제는 이복형 유승(劉勝)을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중산국에 봉했으니 그가 유비의 조상인 중산정왕(中山靖王)이다.

유주 탁군은 낙양으로부터 1800리

<후한서> 군국지에 탁군은 낙양으로부터 1800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계현에 인접해 있다. <수경주>에 "중산(中山)[국]의 치소는 노노(盧奴, 지금 정주시)로서 당현(唐縣)의 옛 성이 [중산]국 북쪽 75리에 있다." 하였다. 중산은 지금 보정시에 속한 현급시인 정주시(定州市)이며 정주시 북쪽에 보정시 속현으로 당현이 있다.

당현이 곧 고대 연나라의 도읍지 계(薊)인데 중국학계는 이보다 북쪽에 있는 북경을 계로 비정하고 있다. 요동과 마찬가지로 지명이동이 된 대표적인 경우인데 다음 장에서 후술하고자 한다.

부연하면 유주의 가장 남쪽이 보정시에 속한 현급시인 정주시이며 고대 중산국이 있었고 중산국의 치소는 보정시 속현인 당현(唐縣)이라는 것이다. 즉 전국시대의 연나라 영토에 중산국이 위치했다는 것이며 그 범위는 남쪽은 정주시이고 북쪽은 당현이었다. 모호했던 연나라 영토의 범위도 이와같다.

정주시는 중원에서 석가장시를 지나 동북방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이세민이 고구려를 칠때에 정주를 거쳐갔다. 기주를 분리하면서 고대 연나라 지역을 유주에 소속시켰던 이유는 동북방으로 향하는 요충지이었기 때문이다.

후한 13주 행정구역 지도. 기주와 유주는 지금 하북성.  유주는 하북성 중부지방의 북경, 천진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지도에는 하북성 북부, 만주 요령성을 지나 한반도 서북부까지 그려져 있다. [출처= 나무위키]
후한 13주 행정구역 지도. 기주와 유주는 지금 하북성.  유주는 하북성 중부지방의 북경, 천진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지도에는 하북성 북부, 만주 요령성을 지나 한반도 서북부까지 그려져 있다. [출처= 나무위키]

2. 유주 요동군은 고대의 한중 경계선

앞장에서 유주 11군 가운데 탁군, 광양군, 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8군은 고대 조선의 영토라고 했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5군은 서기전 3,4세기에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조선으로부터 빼앗은 땅이며, 이 가운데 가장 동쪽이 요서와 요동이다.

유주의 요서와 요동을 가르는 분기점이 대체적으로 요수(遼水)이며 요수의 동쪽을 요동이라고 한다. 요동은 진, 한대 부터 한중 고대국가의 영토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요수의 위치에 따라 요동이 달라지므로 이를 두고 학계에 논란이 자심했다. 또한 요수는 갈석산에서 발원하므로 갈석과 요수는 한중 양국간에 해묵은 논쟁거리이었다.

요동땅 바깥에 낙랑과 현토는 서기전 108-109년에 전한의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한 군현이며, 대방군은 후한말 삼국시대에 요동을 독립적으로 지배했던 공손강이 원래 고조선의 진번국이었던 낙랑군 남부도위를 분리하여 설치했다.

낙랑 현토 대방은 313, 314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1차로 수복했고, 광개토대왕이 요동까지 점령함으로써 요동은 중원국가와 고구려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부상했다. 중국이 요동의 위치를 조작하기 위하여 광분하는 이유는 요동을 옮겨 놓음으로써 고구려 영토가 축소되고 저들의 동북공정이 한결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 논란의 중심에 요수(遼水)가 있다.

요(遼)는 큰 강을 의미하는 우리말 '아리(수)'의 음차

명,청대 이후 요동은 통설상 현재 요령성 요하(遼河) 이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요하(遼河)는 '요(遼)'자만 같을 뿐 이전 시대의 요수(遼水)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거란이 대요를 건국한 이후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 치세기에 '요나라의 강'이란 의미로 요하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0세기말 11세기초이다.

고대의 요수는 '요나라의 강'이란 요수가 아니라 큰 강을 의미하는 우리말 '아리(수)'를 비슷한 발음이 나는 한자 멀 '요(遼)'자를 빌려와 음차한 표기이다. 일부에서는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요(遼)'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하지만 한문해석에 지나치게 집착한 탓이다. 마찬가지로 패수(浿水), 패강(浿江), 패하(浿河)는 만주어로 강을 의미하는 '피라, 펴라'를 비슷한 발음이 나는 조개 패(浿)자를 빌려서 표기한 것이며, 조개(浿)가 많이 서식하는 강이 아니다.

유주는 지금 북경과 천진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그 동북지방은 오환, 선비,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후삼한), 초기 백제와 신라의 영토이었다. 수,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 수양제와 당태종이 유주 탁군과 계현에 군사를 집결시켰던 동북지방의 최전방이었다.

만약에 낙랑군과 고구려 평양이 대동강에 있었다면 수, 당군은 압록강 쯤에서 대군을 집결시켜 공격준비를 했을 것이다. 유주 탁군과 계현에서 군사를 멈추고 부대를 편성했던 이유는 그 이북은 당시 수, 당의 영토가 아닌 고구려 영토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서북영토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렀다.

<구당서>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으로서 장안(長安)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필자 주, 창해)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창해)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靺鞨)에 이른다."고 하였다.

한, 당, 송대의 25사 중국 정사에 고구려는 하북성의 유주 요동에 위치했다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수를 요령성 요하로 옮겨 놓고 졸본성은 요령성 환인현에,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현에 이름없는 성터로 옮겨 놓았다. 수,당군을 막아냈던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백암성을 모조리 요령성 요하 동쪽에 몰아 놓았다.   <계속>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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