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한(漢) 역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두루 통달한 자가 있으나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 고려 인종
고려 17대 인종(仁宗, 1109년~1146년) 임금은 묘청의 난을 겪은 후에 당대의 신하들이 자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함을 한탄하고 김부식에게 국사를 편찬할 것을 명했다. 김부식은 인종 23년(1145년)에 <삼국사기> 편찬을 완료하고 인종에게 임무를 완수했음을 보고하는 표를 올렸다. 이것을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라고 한다. 금국정벌론과 건원칭제, 서경천도론을 주장했던 묘청, 정지상 일파가 반란을 일으킨지 10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인종은 그가 바랐던 미완의 <삼국사기>를 보고받고 38세의 나이로 그 이듬해에 사망했다.
숙종·예종·인종 3대 걸친 북방정벌의 꿈과 좌절
인종은 윤관 장군에게 여진정벌을 명한 예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예종은 아버지 숙종이 이루지 못했던 여진정벌의 서소(誓疏)를 완수하기 위해 30만명의 별무반을 육성하고 그중 17만7000명을 여진정벌에 동원했다.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숙종대부터 발흥하여 고려의 북변을 위협하였다.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한 고려는 중원왕조에 대해서는 왕을 칭했으나 만주, 한반도, 왜 열도에 걸친 해동에서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한 '외왕내제(外王內帝)'라는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며 그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었다. 완안부의 급격한 성장은 고려의 해동천하관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숙종은 여진정벌의 서원을 사찰에 빌기도 했고 몸소 서경에 나가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1107년 예종의 명을 받은 윤관장군이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설치할 때에 부모국이라고 존중하며 고려에 신속했던 동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가 불과 8년후 1115년에 여진족을 통일하여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1117년에 "형인 대여진금국황제가 아우인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고려는 회답을 유보했다. 해동의 황제를 자칭한 고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의였다.
1122년, 북방정세가 요동치던 시기 14살의 어린 나이에 인종이 즉위하여 이자겸의 횡포를 겪고 개경파와 서경파가 대립한 묘청의 난(1135년)을 지켜보아야 했다. 1125년 마침내 금은 요를 멸하고 만주를 석권했다. 인종은 숙종, 예종대로 이어지는 북방정벌의 맥을 계승하고자 했으나 개경파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했고 북방사를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그마저도 김부식에 의해 능멸되었다. 숙종-예종-인종 3대에 걸친 북방경영의 꿈은 좌절되었고 묘청의 난이 진압됨으로써 서북방을 방어하는 수비군이 붕괴되었다. 곧이어 무신의 난이 일어나 고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대사를 고의로 인멸한 김부식의 변명
김부식은 인종의 어명이 고대사 편찬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방사관론자이고 개경의 문벌귀족파의 대표주자인 김부식은 또다시 북방사관론이 대두돼 서경천도론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고조선과 부여, 발해사를 인멸하고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사만 기술하고 편찬을 완료했다. 왕명을 받고 당연히 기술했어야 할 역사를 누락시킨 자책감에 본인도 꺼림직했는지 인종에게 바친 진삼국사표에서 이에 대해 구구하게 변명했다. 그의 변명을 들어 보자
"우리들 해동(海東) 삼국도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사실이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노신(老臣)에게 그것을 편집하도록 명하신 것인데, 스스로 돌아보니 지식이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범엽(范曄)의 『한서(漢書)』나 송기(宋祁)의 『당서(唐書)』에는 모두 열전(列傳)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갖추어 싣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事跡)이 누락되어 있어서......"
"그러나 저라는 사람은 본래 재주가 뛰어나지도 않고, 또한 학식이 깊은 것도 아니었는데, 늙어서는 날이 갈수록 정신이 흐릿해져서 부지런히 글을 읽어도 책을 덮으면 곧바로 잊어버리고, 붓을 잡으면 힘이 없어서 종이에 대고 써 내려가기가 어렵습니다. 저의 학술의 둔하고 얕음이 이와 같으며, 예전의 말과 일에 대해 어두움이 이와 같사옵니다.
이런 까닭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겨우 책을 완성하였지만 볼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으니, 그저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비록 명산(名山)에 보관하기엔 부족하더라도 간장 단지를 덮는데 쓰이지는 않았으면 하옵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 혼자 편찬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직책은 감수국사(監脩國史)이었고 그 아래 8명의 편수관과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관리 2명을 포함하여 11명이 편찬업무를 담당했다. 본인의 능력이 미달하면 얼마든지 편수관으로 하여금 자료조사를 명하고 수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본심은 삼국 이전의 북방사를 편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고 스스로 고조선과 위만조선 고구려의 도읍지 평양을 대동강 평양이라고 못 박았다.
역사를 도(道)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남송의 성리학자
중국은 남송시대에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라는 유학의 한 풍조가 성행했다. 그들은 성명(性命) 이기론(理氣論)만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고대사, 즉 요순과 하상주 3대 역사를 '이제삼왕의 도(二帝三王之道)'라고 하여 도(道)의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제(二帝)는 요순임금, 삼왕(三王)은 하상주를 건국한 우왕, 탕왕, 무왕을 이른다.
남송의 성리학자 채침(蔡沈, 1167~1230)은 스승인 주희(주자)의 유훈을 받들어 <서전>을 해설한 <서경집전>을 저술하고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제 삼왕의 다스림은 도를 근본으로 삼고(二帝三王之治 本於道)
이제 삼왕의 도는 마음에 근본을 둔 것이니(二帝三王之道 本於心)
그 마음을 얻는다면(得其心)
도와 더불어 다스림을 가히 얻는 것이리라(則道與治 固可得而言矣)”
역사를 인멸한 고려의 사대 유학자, 김부식
반면에 동시대에 고려 유학자들은 요순 하상주 시대의 역사와 처음과 끝을 함께하는 고조선과 부여 2천여년의 역사를 인멸시키고 이제삼왕의 중국 고대사를 마치 우리 역사인 것처럼 받들었다. 겨우 고려후기에 와서야 몽골족이 침입하자 북방사를 소환하여 국민정신을 진취적으로 일신시키고자 하였으나 사대사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청평 이명의 <진역유기>, 이암 선생의 <단군세기>는 이때 나온 고조선 역사책이다.
사즉도(史卽道) 도즉사(道卽史)
고조선 역사는 도와 함께 시작된 역사다. 사즉도(史卽道)요 도즉사(道卽史)이다. 남송시대 주자학자들이 '이제삼왕의 도'를 말하기전에 우리에게는 천지인(天地人) 삼신일체(三神一體)의 도가 이미 존재했다.
공자가 요순 하상주 3대 역사를 집약한 <서전>은 고조선의 삼신일체의 도가 중원으로 전파되어 이루어진 역사기록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북방사의 맥과 정신을 계승하지 않고 공자가 만든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유교사관에 종속된 역사관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재편했다.
반면에 <일본서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400여년 전인 680년에 착수하여 720년에 완료했다. 왜 열도 역사는 한중역사에 비해서 일천하고 보잘것없는 역사이지만 무려 40년동안 편찬에 공을 들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만세일계의 역사관으로 일본사를 재편했다. 대화정신(大和精神)이라는 오늘날의 일본정신은 <일본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사기>는 한중일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편찬된 역사서로서 고조선의 도를 바로 세우지도 못하고 <일본서기>처럼 한국혼을 창출해 내는데에도 실패했다. 김부식은 사즉도(史卽道)요 도즉사(道卽史)인 배달국과 고조선의 도와 역사를 인멸하고 그 지엽말단인 송대의 유학을 되려 숭상했으니 이런 역사를 배웠던 고려 조선이 소중화국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부식을 꾸짖는 북애자 선생
조선조 숙종 연간에 북방사의 맥을 이어받아 <진역유기>를 저본으로 삼고 <규원사화>를 저술한 북애자 선생은 구구한 변명을 늘어 놓은 김부식을 통렬하게 꾸짖었다.
"괴이하게도 김부식이 인종(仁宗)을 위하여 <삼국사기>를 편수하며 2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해동 삼국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조대기(朝代記)>의 이름이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지공기(誌公記)>, <삼성밀기(三聖密記)>등의 책과 함께 세조(世祖)가 내린 구서(求書)의 유시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하략)."
김부식이 북방대륙사를 인멸하고 쓴 <삼국사기>의 폐단으로 인해서 고려, 조선시대를 거처 지금까지 압록강 이북의 역사에 대해서는 묻는자가 없었으니 북방대륙의 웅혼한 국민정신을 저해하는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음이 자명하다. 반도식민사관이라고 일제만 탓할 일은 아니다. 그 밑작업은 이미 고려중기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일제는 그 과실을 정리하여 식민통치에 적합하도록 조선사를 개악했을 뿐이다.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가장 먼저 고대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우고 유가가 쓴 <삼국사기>와 불가서인 <삼국유사>만 남겨놓은 소이가 여기에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삼국사기> 이후 우리나라 국사는 출발점도 없고 지향점도 없는 유랑극단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변국으로부터 역사왜곡의 풍파가 높이 다가오는데 지금도 정파와 학맥,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우리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다르고 경중을 달리한다.
역사는 나라의 근본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고려 이후 천여년 가까이 질곡의 시대를 끝내고 경제 문화분야에서 부터 국운융성기에 들어섰다. 우리가 소원하는 민족통일을 이루고 세계중심국이 되어 고조선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국가관과 역사관을 정립하고 나라의 근본을 다시 세워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삼국사기>가 인멸한 대륙 북방사를 다시 찾고 모든 국력과 지성을 결집하여 인종임금이 그토록 원했던 민족정사 <한국통사>를 편찬해 내는 것이다.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