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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천자(天子)의 나라에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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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천자(天子)의 나라에는 부족함이 없다”
  •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 승인 2023.03.13 1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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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건륭제, 영국의 수교 요구를 거절하다

1793년 열하성(현 하북성 승덕시)에 새로 건립한 청나라 황제전용 여름별장으로 영국의 조지 3세가 보낸 수교사절단이 찾아왔다.

이들을 맞이한 83세의 건륭제는 "청나라는 천하의 중심으로 모든 물자가 자급자족된다"고 말하고, 영국의 매카트니 백작 일행의 수교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禮)를 거부하는 서양 오랑캐가 조공무역도 아니고 중화제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상거래를 하자는 개항요구는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영국왕이 보낸 사절단은 수교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거뒀다. 자신들이 타고 온 현대식 증기선보다 한참 낙후된 돛단배가 떠다니는 동양의 노제국의 민낯을 보고 돌아갔다.

그로부터 49년 후, 1842년 청나라는 증기선과 신식대포를 앞세운 영국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홍콩을 99년간 영국에게 할양하고 광동, 상해 등 5개항을 강제로 개항당했다.

여름날 가장 무더움을 느끼는 시간은 오후 2~3시경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태양이 남중을 지나고 기울어지는 시간이다. 청나라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134년의 전성기 시대였던 <강건성세(康乾盛世 1661~1795년)>에 취해서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영국은 이제 막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요시다 쇼인, 조슈의 작은 서당에서 개화 지도자 80여명을 길러내다

“에도(江戶)막부가 기울어가던 1854년 4월의 어느 날 밤 24세의 일본 청년이 미국 페리 제독이 몰고 온 함대의 흑선에 올라 서양 문물을 공부하게 나를 미국에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그 죄로 14개월간 옥살이를 했던 이 젊은이가 훗날 조선정벌론을 주장하기도 했던 명치유신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요시다는 그 뒤 고향인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현)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작은 서당에서 일본의 개화 지도자 80여명을 길러냈다."

그로부터 40년 후, 1894년 일본은 서해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대청제국의 무릎 꿇리고 대한제국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무력화시켰다.

건륭제가 사망한 후에 청나라는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태평성대의 이면에 가려진 관리들의 부정부패였다. 이것은 풍류문인의 기질을 가진 건륭제 자신이 방조한 면도 있었다. 건륭제는 화신이라는 인물을 그 능력만 보고 총애했는데 실상 그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부패관리였다. 건륭제 사후 보름 만에 화신은 부패관리로 지목받고 자결 명령을 받았는데 그가 남긴 재산은 무려 9억량에 달했다. 이 돈은 당시 청나라 12년치의 국가예산이었다고 하니 그가 권력을 남용하여 지방관료들로부터 받아들인 뇌물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다.
 

청조 관리의 부패와 백성 수탈 그리고 '태평천국의 난'과 '의화단 운동'

지방관리의 부패는 백성들에 대한 수탈로 이어졌고 청나라 왕조에 대한 불만은 쌓여갔다. 그 신호탄이 건륭제의 아들인 가경제 2년(1796년)에 일어난 불교 정토종의 일종인 <백련교도의 난>이었다. 이 난은 무려 9년이나 지속되었고 여기에 소요된 전비는 국가재정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재정문제뿐만이 아니라 정규군인 팔기군(八旗軍)은 유명무실해져서 백련교도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고 <향용(鄕勇)>이라는 지방 의용군이 조직되어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신앙에 기반한 민간의 저항은 청조 말까지 계속 이어졌으니 1850년부터 15년간이나 지속된 <태평천국의 난>과 청조 몰락의 단초가 된 의화단 운동(1899~1901)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태평천국은 교주 홍수전이 예수의 동생을 자처하고 세운 기독교적인 이념의 신정(神政)국가를 표방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에도 정규군은 역할을 하지 못했고 증국번과 그의 제자 이홍장이 조직한 <상군(湘軍)>이 이들의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다. 상군은 청나라 정부의 명에 의해 임시로 창설된 호남성의 지방군으로 이때 각지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창설된 지방군을 향용(鄕勇)이라고 불렀다. 이 향용이 청조 말 지방군벌의 시초가 되었다.
 

청조 몰락의 근본적 원인은 만주족이 한족문화에 동화된 것

청조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은 대외적으로는 서양열강의 침탈, 내부적으로는 부정부패, 팔기군의 쇠퇴에 있었지만 만주족이 한족문화에 동화된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처럼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는데 적극적이어서 그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만주족은 이에 동화된 탓인지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잃기 시작하였다. 건륭제 이후 만주어를 사용하는 인구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청나라 멸망 때까지 계속 하락세를 보였다. 나라가 부강하고 태평한 시절을 거치면서 청나라 건국 초에 활약한 팔기군의 상무정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허약해진 청조를 돕고 외국세력과 외래사상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이 백련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의화단 운동이었다. 이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걸고 북경주재 외국공관을 점령했지만 오히려 열강의 간섭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1899년에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포함한 서양 8개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하여 북경 자금성이 점령당하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자극받은 개혁세력들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만주족을 비판하고 한족공화국을 지향하는 멸청흥한(滅淸興漢)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손문이 주동이 되어 군주제를 폐지하고 서양식 근대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중화민국을 성립시켰으니 이것이 1911년 10월 10일, 대만 중국인들이 쌍십절로 기념하는 신해혁명이다. 청나라는 자금성 안에서만 행세하다가 1912년 군벌 풍옥상에 의해서 성 밖으로 쫒겨나 그 명맥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일본, 명치유신 후 제국주의 침략에 가세

반면에 일본은 1867년에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왕정복고를 단행하고 서양세력과 마찰 없이 근대화에 착수했다. 페리제독이 타고 온 흑선에 놀라 미국과 개국한 지 40년 만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1904년에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동해에서 수장시킴으로써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이 여세를 몰아서 재빨리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1905년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박탈했다. 드디어 1910년에는 한일합방조약을 성사시켰다.

일본은 개혁이 착수한 지 불과 40여년 만에 천황을 중심으로 명치유신 개혁세력들이 일치단결하여 서양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국력이 신장되어 있었다. 1899년 서방 8개 연합군이 의화단 운동으로 고립된 외국공관을 구원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출병할 당시에도 가장 많은 군대를 보낸 것이 일본이었다(일-9,000명, 러-3,500명, 영-2,500명, 미-2,000명, 프-1,000명, 독-200명, 오,이 - 100명).

그러나 이러한 군국주의적인 개혁의 종말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발로 1941년에는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촉발시켰고 그 결과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비극을 자초하였다.
 

청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110년이 지났다

중국은 청조가 사라진 자리에 공산혁명을 성공시켰고 영국에게 조차 당한 홍콩까지 반환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 개혁개방에 성공하여 마침내 청나라를 계승한 대국굴기(大国崛起)시대를 열었다. 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의 패권을 추구하면서 제2의 강건성세를 꿈꾸고 있다.

일본은 패전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천황을 중심으로 명치유신을 단행한 군국주의 신국일본(神國日本)정신과 서양식 자본주의에 기반한 문물제도의 결합을 상징하는 화혼양재(和魂洋才)는 현대 일본정신으로 아직도 살아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청나라의 흥망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없을까?

누루하치는 한족 명나라에 의해서 아버지와 조부를 잃은 원한을 잊지 않고 7대한(七大恨)을 내걸고 이것을 동력으로 삼아 팔기군을 조직하고 만주의 한 부족에서 대륙을 지배하는 대제국 청나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한족과 동화되어 가면서 만주족의 자랑인 상무정신을 잃어버렸고 팔기군은 쇠락했다. 그사이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를 높이 든 한족 혁명세력에게 대륙의 주인 자리를 내어주고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현대중국에 과거 '청' 제국의 판도와 영광을 물려주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만주족 자치현에서 초라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륙국가와 해양국가를 아우르는 Pax Koreana의 꿈

우리는 어떠한가?
일본이 100년 전에 성취했던 서양의 과학기술과 경제, 문물제도를 배우고 따라잡기 위한 한국판 유신에 성공하여 근대화를 이루어냈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비대해진 몸집에 비해서 정신이 빈약한 졸부국(猝富國)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에 나라의 반쪽은 여전히 철 지난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선군주의 강국, 주체조선(主體朝鮮)을 꿈꾸며 이념 과잉 사회로 후진했다.

이제는 한강의 기적을 넘어 급성장한 국격에 걸맞게 한민족의 미래를 담아낼 청사진이 필요하다.

중국인에게 대국굴기의 꿈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변방국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념을 정립하여 대륙국가와 해양국가를 아우르는 꿈을 펼쳐 보아야 할 때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서양 시대의 Pax Americana가 저물어 갈 무렵에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태평양 시대의 Pax Koreana의 꿈을 그려 볼 만도 하다.

한국인에게는 중, 일과 달라야 하는 한국정신이 있다. 그것이 한국혼(韓國魂)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되새기는 목적은 그러한 혼을 찾아서 국가경영에 반영하고 남과 다른 국격과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흔해 빠진 민주, 평화, 자유 같은 서양이 쓰다가 버린 철 지난 유물이 아니다. 한민족 고유의 한국혼(韓國魂)을 되찾는 것이 진정한 시대정신이다.

선인들은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혼’이라고 했다. 한국혼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청나라의 흥망에서 교훈을 찾아보고자 청나라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 혼(魂)이 무엇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할 숙제로 남기면서 청나라 역사기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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