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의 기원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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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의 기원과 의미
  •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 승인 2024.02.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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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중국이라는 명칭은 아득한 고대로부터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시사적인 의미의 중국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中共)이나 중화민국(타이완)의 약칭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명칭 자체는 우리나라의 ‘조선(朝鮮)’이나 ‘한(韓)’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그 의미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정치적인 의미에서 근대국가로서의 국명으로 이해하고 있고 역사에 조예가 있다는 자들도 서세동점 시기의 아편전쟁 발발 이후에 중국인이 민족적인 자각을 하면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중국'을 대외적 국호로 처음 사용한 청나라

근대에 국호로써 중국이라는 표현을 대외적으로 처음 사용한 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였다. 러시아와 흑룡강 상류인 몽골의 아르군강과 외흥안령산맥(外興安嶺, 스타노보이)산맥을 양국 간의 국경으로 확정 지은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청나라는 스스로를 만주어로 “ᡩᡠᠯᡳᠮᠪᠠᡳ ᡤᡠᡵᡠᠨ(dulimbai gurun, 가운데에 있는 나라)”으로 칭했다. 청나라는 건국 초에 명나라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집중하느라고 동진하는 러시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다가 1689년 8월 27일 청 제국과 러시아 차르국 사이에서 최초로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아편전쟁(1840-1842) 결과 체결된 남경조약(1843년)에서 청나라는 국호를 청(淸)이 아닌 중국(中國)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비록 영국과의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중국이라고 칭했다. 

2차 아편전쟁(1856-1860)이 발발하자 그 사이에 동쪽으로 더 진출한 러시아는 청나라를 위협하여 아이훈 조약(愛琿條約, 1858년)을 맺고 흑룡강을 영토경계로 삼고 시베리아 북만주의 유일한 농경지대인 삼강평야를 확보했다. 한반도 면적의 3배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다. 이때 우수리강 서쪽은 청나라 관할로 하되 동쪽의 연해주는 공동관할로 두었다가 2년 후 1860년 북경조약을 맺고 연해주를 러시아 영토로 확정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동해로의 진출이 막혔고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이라는 부동항을 확보하게 되었다.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된 것은 불과 160년 전이다. 
 

중국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의미 

우리가 통상적으로 정치 지리적인 대명사로서 중원(中原), 중토(中土), 중화(中華), 화하(夏華), 제하(諸夏), 지나(支那)와 동의어로서 사용하는 중국이 어떤 유래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최초의 용례는 시경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은 2,500년 전에 주(周)나라 때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에 최초로 등장한다. 대아,민로편에 "혜차중국 이수사방(惠此中國, 以綏四方)"이라는 귀절에 나타나는데,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부터 혜택을 베풀고 편안함으로써(綏, 편안할 수) 사방(천하)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때의 중국은 국명이라기보다는 ‘나라의 중앙’, 즉 서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나라 때에 <시경>을 연구한 모잠은 “중국은 서울이다(中國, 京師也)”라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경사(京師)는 제왕이 거주하는 도읍지로서 역대 중국사서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인데 주로 장안(섬서성 서안)이나 낙양(하남성)을 이른다. 제왕이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이 거주하는 서울(중국) 백성들부터 돌보고 점차 사방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후한 말에 경학에 능통했던 유희(劉熹)의 설명처럼 제왕이 거주하는 곳을 ‘중(中)’이라고 불렀다. 한무제 유철이 동중서 등 춘추공양학파를 등용하여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나서부터는 소위 중화사상이 배태되어 중토를 제외한 나머지 동서남북은 모조리 오랑캐 딱지를 붙이고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비하했다.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만에는 벌레충(蟲), 북적에는 개견(犬)자가 들어가 있다. 서융은 방패와 창을 잘쓴다는 뜻이고 동이는 큰활(大弓)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중원 왕조의 범칭 '중국'

중국은 대개의 경우에는 중토에 위치한 왕조(국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정한 국가를 지칭할 때에는 하, 상, 주, 한, 당, 송, 명, 청 처럼 국명을 사용했지만 이들 국가를 범칭할 때에는 중국이라고 하였다. 

'동이열전'에서의 중국

이런 용례는 2300년 전에 공자의 7대손이라고 하는 공빈(孔斌)이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이라는 책에 나타난다. 그는 BC 268년에 위(魏)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동이를 흠모한 공자의 후손답게 동이에 관한 자료를 모아 간단한 기록을 남겼는데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서 ‘중국으로 들어가(而入中國)’ 천자가 되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이때의 중국은 중토(中土)의 나라를 의미한다.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별의 방위로는 북방(箕尾星)이며 땅은 선백(鮮白)에 접했다. 신인 단군(檀君)이 계셨는데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요 임금 때에 나란히 임금이 되었다.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천자에 올라 백왕의 우두머리가 되어 다스렸다.”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竝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 빛났다(英名洋溢乎中國)’
 
“유위자(有爲子)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꽃다운 이름은 중국에 빛났다. 이윤(伊尹)이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은나라 탕왕의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그 나라(동이)는 비록 강대하지만 교만하지 않았고 병사는 강했지만 침략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하여 길을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나누며 남녀는 거처를 달리하여 동석하지 않았으니 가히 동방예의 군자국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동이족 스승 유위자에게 배운 이윤은 은나라 탕왕을 도와 하나라를 정벌했다. 
 

우리나라에서 범칭으로 '중국'을 사용한 기록

신라의 삼국통일 후 당나라와의 전쟁시기에 대당결전을 각오한 문무왕 김법민과 당나라 장수 설인귀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에 설인귀는 당나라를 ‘중국’이라고 표현했고 문무왕도 ‘중국’이라고 표현한 문장이 나온다.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 

“마땅히 전력을 기울여 <중국>과 신라가 서로 변하지 말고 서로 도와 병기를 녹여 없애고 공평무사한 마음을 심정으로 삼는다면, 자연히 후손에게 계책을 남기게 되어 자손을 돕게 될 것이니, 훌륭한 사학자의 칭찬을 받음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편안한 터전을 버리고 떳떳함을 지키는 계책을 싫어하여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아버지의 말씀을 저버려 천시(天時)를 업수이 여기고 이웃나라를 속여서 한 모퉁이(신라)의 땅인 궁벽한 구석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게 되었습니다.”

<문무왕의 답서>

“이리하여 1만 명의 <중국> 병사는 4년 동안을 신라에서 입고 먹었으니, 유인원으로부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땅에서 났으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니, 조국의 은혜와 덕택은 비록 끝없는 것이라 하겠으나 신라가 성의를 다한 것도 또한 가엾이 여길 만한 일입니다.” <삼국사기> 문무왕 11년(671) 기사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위중국거여’

고려 중기 1145년(인종 23년에 편찬된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위중국거여(爲中國巨蠡)’라는 놀랄만한 기록이 있다. 선생의 문집(文集)에 있는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올리는 글인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의 내용을 인용했다. 때는 진성여왕 7년(893년),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2년 직후이다.
 
“엎드려 듣건데, 동해밖에 세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이 마한 변한 진한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이니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수나라(隋) 황제가 말고삐를 잃은 것은 요동(고구려)를 정벌했기 때문입니다....(이하생략)”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 <삼국사기(三國史記)>제46권 열전 최치원전(崔致遠傳)
*蠡 좀먹을 려(여), 옴 라(나), 표주박 리(이) 
*馭 말 부릴 어

중국대륙을 침공한 고구려와 백제

‘남으로 오.월(吳.越),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는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 중국의 동해안 전역을 포괄하는 옛 국명이다. 이 일대를 고구려와 백제가 침략하고 흔들어댔다는 이야기인데 ‘중국(中國)’이라고 총칭했다.

1446년 9월에 발간한 <훈민정음>서문에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 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할 때의 듕귁(중국)은 중원왕조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중국은 명나라였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이미 중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음력 9월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고 있다. 

<진서(晉書)> 재기 모용외편에 “나는 선공이래 대대로 중국을 받들었으며(吾先公以來世奉中國)”하는 귀절이 있다. 서진시대에 선비족 모용외는 스스로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라 칭했다. 요서에 터전을 잡고 진나라에 맞서다가 패하자 표문을 올려 진나라에 복속하는 장면이다. 진(晉)을 중국이라고 표현했다. 

근현대 국호로서의 중국

아편전쟁 이후에 청왕조가 만신창이가 되어 서방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민족정신에 눈이 뜬 중국인들은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를 내걸고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켰다. 청왕조를 타도하고 삼민주의를 표방하는 한족(漢族)의 근대국가를 성립시켰다. 더이상 만주족의 왕조가 아닌 화하민족의 민국(民國)이라는 뜻으로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고 하였다. 그 약칭이 ‘중국(中國)’이다.
 
공산혁명을 일으켜 국공내전에 승기를 잡은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으니 그 약칭도 중국(中國이다. 타이완 섬으로 쫒겨난 장개석의 중화민국은 국호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국제적으로는 중국이라는 타이틀을 상실하고 타이완으로 통칭된다. 

중국은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끝으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중국은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토를 장악한 누구나 중국이 되고 중화를 자칭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중화는 하북성과 산동성, 하남성을 지배했던 배달민족이었다. 훗날 섬서성 서안에서 흥기한 주나라가 중토를 장악하고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가 실질적인 통일제국이 되면서부터 서방족이 중화를 자칭하고 주변 민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하였다.  

그러나 중국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족보다는 주변의 선비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들이 지배한 역사가 더 장구하였다. 아쉽게도 중토에 들어간 자들은 모두 중화문명에 용해되어 한족화되었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오로지 배달 한민족만이 중화와 다른 역사, 문화, 언어, 관습을 지켜왔다. 

최초의 중화는 배달민족

한족이 시초에 창달한 것으로 포장된 중화문명도 그 모태는 배달민족 가운데 새(鳥)를 토템으로 숭상하는 조이계(鳥夷係)가 남하하여 세운 은나라의 황하문명이 모태가 되었다. 은상(殷商)의 시조인 설(契)은 유융씨(有娀氏)의 딸이며, 제곡(帝嚳)의 둘째 비(妃)인 어미 간적(簡狄)이 자매들과 목욕을 하던중에 제비알을 받아먹고 낳았다고 하니 명백한 새족이다. 

공자가 중화역사의 개창조로 추앙하는 요, 순임금도 화하족이 아니었다. 맹자의 지적처럼 요는 북적인(北狄人)이고 순은 동이인(東夷人)이었다. 요가 터전을 잡았던 산서성 임분시 도사 유적지는 원래 화하의 땅이 아니라 개(犬)를 불(火)에 구워먹기를 즐기는 오랑캐 북적인(北狄人, 북방 유목민)이 황하중류로 남하하는 길목에 위치했다. 동이와 북적을 남만, 북적과 더불어 오랑캐(四夷) 라고 멸시했는데 역설적으로 동이와 북적이 중화역사와 문명을 일으켰다고 자인한 셈이다.
 
중고이래 변방의 소중화국으로 살아온 배달 한민족이 21세기에 세계중심국이 되어 대중화(大中華)의 타이틀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