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만주의 미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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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만주의 미래를 본다
  •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 승인 2022.02.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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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크라이나 양국 갈등의 역사적인 배경과 만주, 한반도 관계와의 유사성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br>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우크라이나 사태와 주변 정세

작년 11월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러 간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충돌 직전단계에 도달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나토의 동진을 저지해야 하는 러시아 입장과 구 동구권 국가를 친 서방국가로 만들어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미, 나토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한 사태가 쉽게 타결될 가능성이 많지 않다. 

구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루마니아와 폴란드는 이미 친서방화 돼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마저 서방측에 가담하게 되면 러시아는 미군과 직접 국경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 돼 러시아로서는 어떻게든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최악의 사태를 저지해야 할 입장이다.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삼면에서 포위하고 공격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서방이 경제재제라는 카드를 들고 나와 주춤거리면서 공격시점과 명분을 저울질하고 있다. 

문제는 군사적인 침공으로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정당성이 러시아에 대한 유럽연합의 경제제재를 상쇄하고 남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2014년에 크림반도를 병합한 대가로 유럽연합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는 러시아로서 추가적인 제재는 러시아에 경제적인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유럽연합도 경제제재로 인한 일정부분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때문에 상호 간에 설정해 놓은 레드라인만 넘지 않는다면 탐색전을 펼치면서 대치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그 레드라인이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유럽연합의 대척점

이것은 마치 중국이 압록강에서 미군을 마주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북한을 적극 지원하면서 완충지대로 삼고 있는 것과 같다. 러시아의 고민은 친러 성향의 벨라루스와 달리 우크라이나는 반러 성향에 나토가입을 적극 원하고 있다는데 있다. 대 슬라브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러시아 입장에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경제, 안보 두 가지 측면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초래한다.

동슬라브 3국(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을 통합해 구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야심가 푸틴에게 인구 4천만명에 남한의 6배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우크라이나가 서방권으로 넘어가는 것은 군사대국 러시아의 국제적인 위상을 추락시키는 굴욕일 뿐만 아니라 나토의 동진과 함께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자칫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국가연합(CIS)의 붕괴를 촉진시킬 수도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물러설 수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러시아의 바람과 달리 결코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는 친러파와 반러 민족주의자들의 대결로 국내정정이 불안한 가운데에 국민의 64%가 나토가입 찬성으로 돌아섰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분리독립 세력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서 반러 감정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게 마지막 남은 카드는 우크라이나를 직접 공격해 친 서방정권을 붕괴시켜 친러 정권을 수립하거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분리시켜 크림반도처럼 러시아 영토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서방측의 시각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긴장사태의 원인을 러시아의 침략주의, 혹은 제국주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 사태를 관찰해 보면 대 슬라브 민족주의와 소 슬라브 민족주의의 충돌이다. 러시아는 대 슬라브 민족주의의 종주국이며 슬라브족의 일원인 우크라이나는 종주국 러시아에 통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독립된 다른 국가이지만 원래는 게르만 민족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었듯이 이 두 나라는 같은 동슬라브 민족으로서 뿌리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논리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주독립국으로서 우크라이나 국민의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 

이 사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우리로서는 멀리 떨어진 서방의 문제로 치부하고 동서 냉전구도가 아직도 작동하는 유럽에서 미, 나토와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양상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양국 간의 전쟁발발이나 동서진영의 대립 같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넘어서, 장차 통일한국과 중국, 혹은 독립된 만주국과 통일한국 사이에 만주를 두고 어떤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상상으로 전개된다. 서쪽의 먼 나라 사태이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벌어질 미래상황에 교훈적인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러시아는 머리를 잃는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우리는 머리를 잃는다”고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정학적인 문제 외에도 역사적인 연원이 깊다. 러시아의 옛 이름인 ‘루시(Rus')’란 명칭은 9세기경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건국한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에서 비롯됐다.

루스인은 북유럽의 스웨덴이 기원지로 북게르만계 민족인 노르드인(바이킹)의 일파이며, 바리야그인(바랑기아인)이라고도 부른다. 바리야그의 의미는 ‘노를 젓는 사람’, 혹은 ‘발틱해의 전사들’이라고 한다. 중국이 구 소련의 우크라이나에서 건조된 항공모함을 인수해 산동호로 개명한 원래의 함명이 ‘바리야그(Varyag)’인데 러시아가 조상들의 용맹성을 기리는 의미에서 붙여준 명칭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러시아인들은 루시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다. 

루시인은 8세기말 ~ 9세기에 걸쳐 동유럽으로 이동해 동스라브인이 주류를 이루는 키예프 지방을 정복하고 루시인의 나라, 키예프 공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882년부터 1240년까지 약 400년 동안 현재의 러시아, 벨라루스 일대에 소 공국들을 건설하고 슬라브 민족과 동화됐지만 강력한 루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남겼다. 오늘날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국명에는 ‘루시’인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키예프 공국은 1240년 몽골 타타르의 침입으로 인해서 처참하게 붕괴됐고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민족으로 각기 분화됐다. 

현재의 러시아는 몽골군단의 침입으로 인해서 키예프 공국이 붕괴되고 난 후에 건설된 모스크바 루스(공국)를 모체로 성장한 나라이다. 원래 모스크바는 1147년에 모스크바 강가에 건설된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모스크바 공국은 키예프 공국을 건설했던 류리크 왕조의 왕족이었던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1263년에 모스크바 지역을 영지로 획득했고, 이를 기반으로 1283년에 모스크바를 수도로 정함으로써 모스크바 공국이 건설됐다. 

이들은 점차 주변의 소공국을 병합하고 대공국으로 발전해 키예프 공국 이후에 분열됐던 루시인 공국들을 통합해 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몽골의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동스라브 공국들의 조세징수 대행권을 획득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드디어 1480년에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영토를 발틱해까지 확장했다. 16세기 초에는 분열된 여러 루스 공국들을 통합하고 이반 4세는 1547년부터 소국 군주를 의미하는 대공(大公, Grand Duke)이라는 호칭 대신에 짜르국 러시아를 선포하고 ‘짜르(Tsar)’라는 군주의 호칭을 사용했다. 
 

400년 간 분열된 시기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 역사적 단절 발생

1240년 몽골의 침입으로 분열됐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폴란드 치하에 있다가 1654년과 1772년에 각각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 병합됐다.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1613-1917년)는 모스크바 공국의 ‘류리크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기 때문에 루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 400년 동안의 분열된 시기에 서로 다른 역사적인 환경을 겪은 탓으로 같은 동슬라브족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간에는 역사적인 단절이 발생했고 서로 다른 이질적인 민족 정체성이 형성됐다. 이런 상황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해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고 레닌이 주도한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되자 우크라이나는 소연방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나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자 러시아가 주도하는 CIS(독립국가연합)에서 탈퇴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를 루시(Rus', 러시아)인이 건국한 최초의 역사로 인식하는 공통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키예프 공국이 붕괴된 1240년 이후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는 다르다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중세시대 키예프 공국을 건설한 루스인의 후예임은 인정하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모스크바 공국을 모체로 하는 러시아 제국의 러시아 국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장차 남북한 통합돼 하나의 통일국가를 수립하고 만주 고토회복을 시도할 경우에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한국인의 관념적인 역사관은 한반도와 만주가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한·중 양국으로 분리돼 있지만 원래는 고조선이라는 하나의 역사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주 대륙에서 명멸했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계승한 정통국가로서 만주회복의 염원을 잊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역사관, 지정학적인 입장은 한국인의 만주에 대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러시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분리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2개주는 만주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비교될 수 있다. 

우리가 만주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인 연원에도 기인하지만 만주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가지는 중요성 때문이다. 영국의 지정학자 매킨더(Halford John Mackinder, 1861-1947)는 20세기 초에 ‘추축지대(pivot area)’와 ‘심장지역(Heart Land)’ 개념을 차례로 제시했다. 한마디로 동유럽을 지배한 자가 동부유럽과 러시아로 구성된 심장지역을 지배하고, 심장지역을 지배한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논리이다.

미국의 알프레드 마한이 해양력 이론을 제시하자 미국은 태평양으로 진출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매킨더 이론은 유럽국가이면서도 전통적인 해양강국인 영국의 대륙정책에 수용돼 심장지역을 지배하는 대륙의 패권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세계 1·2차대전에서 프랑스, 러시아와 독일이 패권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영국이 극력 저지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만주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아시아의 심장지역

우크라이나가 유럽대륙에서 동서세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했다면 만주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심장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해양세력이 만주를 장악하면 대륙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로 삼을 수 있고, 반대로 대륙세력이 장악하면 해양으로 진출하는 발판 역할을 할 수 있다.

근대에 만주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나라는 중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군국주의 일본이었다. 일본은 청조 말부터 만주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닫고 국책사업으로 만주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멸청흥한(滅淸興漢)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서 자금성이 혁명군에 점령되면서 종말을 고했다.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청 제국이 멸망하고 대륙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청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만주를 포함한 내몽골, 외몽골은 분리되거나 독립됐다. 

이런 만주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본에서 만주연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백조고길(白鳥庫吉, 시라토리 구라키치)이었다. 그는 1907년 12월 일본 문부차관의 소개로 대륙진출의 첨병 역할을 하는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을 찾아가서 ‘만주역사의 편찬이 가까이는 전쟁의 경영을 완수하고 멀리는 국가 백년대계를 수립하기 위한 현 상황하의 급무’임을 역설했다. 만철 산하에 《만주역사조사부》라는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만주경영과 조선침탈의 역사적인 이론인 만선사관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연구기관 출신 인물들이 훗날 한국사를 반도사관으로 축소하는데 앞장섰음은 물론이다.
 

<만주역사 편찬의 급무>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주장 

그는 <만주역사 편찬의 급무>에서 만주의 중요성에 대해서 매킨더의 심장지역 이론에 필적할 만한 명쾌한 지리적, 역사적인 논리를 전개했다. 그의 주장을 들어 보자.

“최근의 2대전쟁(필자 주: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며 동양에 있어서 우리나라(일본)의 위치가 점차 높아지고 그 직책 또한 점점 중요성이 더해지는 오늘날, 가까이는 전쟁의 경영을 완수하고 멀리는 국가 백년대계를 수립하기 위해 동양의 사물에 관해 학술상으로 조사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 첫째로 충분치 못하다.... 만주지방의 역사가 국가영달의 대계를 정하는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절요한 자료임은 고래로 이 땅에 흥망한 수많은 민족의 세력성쇠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또한 잘 드러난다."
 
"역사를 살피건대 만주지방은 실로 동양 화란(禍亂)의 원천으로, 서쪽으로는 몽고의 광야를 남쪽으로는 중국을 움직이게 하고, 동남쪽은 한반도의 수미(首尾)와 통해 직접 그 영향을 우리나라(일본)에 미치며 4천여년 동안 몇번인가 동방 아시아의 풍운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이 이 땅에 존재했다.... 때문에 동방 아시아의 역사에 통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만주사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고 만주사를 이해하면 동방 아시아사는 곧바로 먼저 해설될 수 있다."

"만주의 땅은 한(漢)인종과 북방 여러 씨족과 한(韓)종족과의 회합점에 있고 이 땅에 세력을 얻는 자는 항상 사방을 위협해 동아의 형세를 변동시켰다. 한반도는 그 남쪽 아래의 요충지에 해당하며 항상 이에 굴복당하고 우리나라 또한 이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부여, 말갈의 옛날부터 청·러의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민족이 같지 않고 그 흥망성쇠의 자취가 다르다고 해도, 대개 나아간 바가 항상 궤를 같이 해 세상에 역사가 반복되는 일에 이와 같은 적절한 사례가 없을 것이다."
 
"과거는 장래의 거울임을 안다면 이와 같은 역사의 만주 땅에 지대한 임무를 지닌 우리 국민이 자세히 그 유래를 탐구해 그 상황을 아는 것은 만주의 경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대비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에 나라를 두고 아시아 문명의 개도자로서 천직을 지닌 우리 국가 전반의 위정에 관해서도 또한 필수의 사업이다.” <근대 일본의 조선사연구와 만주역사조사부. 박지영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 연구교수>

만주에 집착하는 일본은 드디어 1931년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그들의 야망은 이듬해 청(淸)의 마지막 푸이(溥義) 황제를 국가 원수에 해당하는 ‘집정(執政)’에 앉히고 만주국을 건국함으로서 현실화됐다. 길림성 장춘을 수도로 정하고 신경(新京)이라고 불렀다.

만주국은 인구 3천만명에, 영토는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과 하북성 승덕 이북지방(당시 열하성)을 포함하는 4개성에 이르러 한반도의 6배, 유럽의 영국 프랑스 독일 3국을 합친 것보다 컸다. 지배기간은 1945 패망 때까지 14년에 불과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만주에서 청·러 세력을 구축한 후에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이 꿈꾸는 만주에 대한 이상과 현실

만주는 한민족 역사에서 고조선, 대부여, 북부여, 고구려 역사의 중심 강역이었다.

남북한이 통일돼 한반도에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강력한 통일 민족국가가 성립된다면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만주는 일정 부분 한민족의 영향권에 들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주가 무주공산이 아닌 이상 한반도가 통일만 되면 바로 만주를 회복할 것만 같은 소박한 고토회복의 꿈이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엄청난 현실적인 벽에 부딪칠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주는 역사적 인종적으로 한반도와의 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만주 거주자들이 얼마만큼 만주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한민족과 같은 역사적인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미지수이다. 

926년 발해 멸망이후 1,000여년 동안 만주는 요, 금, 원, 청이 차례로 명멸하면서 한반도의 고려, 조선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인 전개 과정을 거쳤고, 더구나 20세기에 들어서 철저히 중국화됐기 때문에 지금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정체성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만주 내몽골 지역은 티벹 신강성의 분리독립 움직임과 함께 중국의 분열을 부추길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요소로 간주된다. 대(大) 중국주의자인 시진핑은 이런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동북공정을 추진해 역사적으로 만주가 중국역사의 일부라고 대못을 박아 두었다. 우리가 만주에서 발흥한 요, 금, 청나라의 역사를 중국사로 치부하는 한 동북공정을 반박해야 할 명분은 초라해진다. 다행스럽게도 요, 금, 청 이전의 부여, 고구려 역사는 중국에 빼앗기지 않고 한민족의 고대사로 간직하고 있다. 중국이 최근에 이르러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우기는 이유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우리가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만주 고토회복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상념에 젖어들게 된다. 2천년 전의 만주 역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역사일 뿐이다. 더구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만주인은 만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중국의 한족이 다수민족이 됐다. 

군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역사가들은 만주침략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했다. 한민족의 미래가 만주회복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만주 역사와 지리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역사를 미래의 거울로 삼고 냉정한 국제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고토회복의 길을 모색할 때에 과거 역사는 미래의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만주의 현재와 과거를 깊이 연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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