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군 서안평의 위치를 나타낸 고대사 지도.
고구려 시대 요동군 서안평의 위치를 나타낸 고대사 지도.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서안평을 알면 고구려 역사가 보인다.

부여국의 시조 동명이 탈출했다는 탁리국은 색리국, 고리국이라고도 하며 하북성 요동군의 서안평에 위치했다고 한다. 학계통설은 요동군 서안평의 위치를 사서에 어떤 관련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압록강 하구 단동일대로 단정적으로 비정한다. 어떻게든지 한국 고대사의 강역을 한반도 가까이 몰아 넣는 것을 조선사 연구의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전한대(前漢代)에서 진대(晉代)까지 요동군(遼東郡)에 소속되어 있던 현(縣)으로, 왕망(王莽) 때 일시 북안평(北安平)으로 그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이곳은 요동지역과 평양방면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의 요지였다."고 원론적인 설명을 한다. 막상 위치비정에 들어가면 요동군을 지금 요하 이동의 요동반도로 보고 평안도 대동강 평양을 고구려의 도읍지 평양으로 단정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어중간하게 압록강 하구의 단동으로 추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문헌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대왕조에 "[94년(146)] 가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후)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현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왔다."고 했다. 태조대왕이 압록강 하구 단동으로 군대를 보내 황해도에 있는 대방태수를 죽이고 평안도에 낙랑태수를 잡아왔다는 것인데 하남성 낙양을 도읍지로 삼았던 후한이 하북성 동북부에서 조차도 머나먼 한반도의 황해도까지 번군을 두고 다스릴 정도로 강력한 대국이었는지 의심스럽다.

또한 만주를 호령했다는 고구려는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올 정도의 전투력을 구비하고 요동공략을 수차례 단행한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천왕이 314년에 대방군을 수복할 때까지 자신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 조차 수복하지 못할 정도로 약소국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더구나 후한말, 요동에 독자세력을 형성하고 양평에서 지배자로 군림했던 공손강이 후한(後漢) 말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낙랑군남부도위를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했는데 대방군이 황해도라면 공손강이 거했던 요동군 양평현은 지금 요령성 요양시일까? 요양시에 앉아서 황해도를 분리시킬 정도로 한반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또한 낙랑군 남부도위 관할 7개현은 옛 고조선의 진번이었는데 황해도가 옛 진번군이었을까?

모든 중국정사에 기록된 고대의 요동군은 하북성 유주에 위치했으며 평양 역시 요동군 요양현에 위치했다.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령한 후에 양평현성은 요동성으로 개명했다. 다시 요동군 서안평으로 돌아가 이에 관한 중국사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본래 한(漢)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의 땅이다. 신(新)나라 [왕]망(莽)은 북안평(北安平)이라 하였다.

한중학계의 통설은 상경임황부가 내몽골 서요하의 가장 긴 지류인 시라무렌강 유역의 파림좌기(巴林左旗)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내몽골 적봉시의 파림좌기가 서안평이 되어야 맞다. 재야 민족사학계도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동설은 성립될 수 없다. 파림좌기가 서안평이 맞는지 사서기록에 부합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상경(上京)은 태조(太祖, 야율아보기)가 창업한 땅이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갖춘 험한 형세가 견고한 요새에 충분하다.

[후(後)]조(趙) 횡해장군 왕화가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통하여 연안평(燕安平)을 엄습하여 부수었다. [이곳은 요동군의 서안평(西安平)이다.]

하지만 파림좌기는 <요사>와 <자치통감>에서 언급한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다거나 바다를 통하여 공격할 수 없는 내몽골 적봉시 북부의 내륙산간에 있다. 연안평(燕安平)이 서안평이라고 했으니 연산(燕山)이나 연국(燕國)이 위치했던 고대의 '燕' 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철주(鐵州) 건무군(建武軍).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안시현(安市縣)으로 고구려 때는 안시성(安市城)이었다. 당태종이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설인귀가 흰 옷을 입고 올랐다는 성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날 4개의 현이 있었다. 위성(位城)•하단(河端)•창산(蒼山)•용진(龍珍)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수는 1,000이다. 경(京) 서남쪽 60리에 있다. 1개의 현을 거느렸다. 탕지현이다.

*<요사>는 고구려 안시성이 京(상경 임황부, 즉 서안평) 서남쪽 60리에 있다고 했다.

암주(巖州)는 본래 고구려의 본거지였다. 당태종이 요(遼)를 정벌하여 백암성(白巖城) 아래에 주둔함으로 인하여 암주를 세웠다. 지금은 거란이 병영을 두어 지키는데, [암]주의 이름은 고치지 않았다. 동쪽 190리에 여진과 경계하고,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동경(東京)에 이른다. 남으로 집주에 이르고 북으로 운산현에 이른다.

*송나라때 편찬된 군사지리서인 <무경총요>는 고구려 백암성 동남쪽 50리에 요나라 동경 요양부가 있다고 했다.

래류하(淶流河)가 서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상경(上京)의 3면을 둘러싸고 동쪽으로 흘러 곡강(曲江)으로 들어가는데, 곡강(其)의 북동쪽 흐름은 안출하(按出河)이다.

래류하(淶流河)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래수(淶水) 즉 거마하(拒馬河)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중국 <維基百科>에 거마하(拒馬河)를 검색하면 거마하는 원래 명칭이 래수하이다(拒馬河原名淶水河), 중국 화북평원에 위치한다(位於中國的華北平原), 하북성 래원현 현성의 남쪽 기산 기슭에서 발원한다(發源自河北省淶源縣縣城南旗山腳下)고 하였다. 바이두 백과는 하북성 래원현 서북 태행산맥 기슭에서 발원하여( 发源于河北省涞源县西北太行山麓) 북경시 방산구 십도진으로 입계한다고 썼다. 래원현은 보정시 서북부 태행산맥 기슭에 위치한다. 그 옆에 역현(易縣)이 위치한다.

요나라 상경(上京), 즉 서안평은 안시성(安市城) 북동쪽 60리에 위치

안시성이 있었던 역현(易縣) 봉황산(鳳凰山)의 북동쪽 60리에 거마하가 흐른다. 今 보정시 래수현(淶水縣) 왕촌진(王村鎮) 일대이다. 이곳은 동남 방면을 제외한 사방이 거마하의 지류들로 둘러싸인 지형을 이루는 곳으로서, '래류하(淶流河)가 서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상경(上京)의 3면을 둘러싼다'는《遼史》지리지의 기록에 일치한다. 요나라 상경(上京)은 안시성(安市城) 북동쪽 60리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고]구려는 대수(大水)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의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소수(小水)가 있었는데, 고구려의 별종(別種)이 소수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나오니, 이른바 맥궁(貊弓)이다.

학계에서 그 위치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고구려의 별종(別種)인 소수맥(小水貊)은 서안평현(西安平縣)의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소수(小水)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소수맥, 대수맥, 서안평은 지금 하북성 보정시 래수현 일원에 위치했다. 이곳이 고대의 요동이었고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의 요람이었다. 부여를 건국했다는 동명의 탁리국, 고리국도 압록강 하구 단동시가 아니라 하북성 보정시 태행산맥 기슭아래 래원현이었다.

*더 자세한 고증은 https://earthlin9.tistory.com/37, 지구인의 고대사 공부방 서안평의 위치비정 1,2,3부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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