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북성은 장구한 세월동안 동이 북방민족의 고토이자 역사의 요람
3-1. 한국 고대사는 허구의 역사
반도사관에 충실한 역사교과서로 한중 역사를 배운 대다수 한국인들은 하북성은 원래부터 중원제국이 지배했던 영토라고 치부하고 만주가 우리민족의 고토라고 굳게 믿고 있다.
중,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고조선은 송화강과 백두산, 부여는 길림성 장춘, 고구려는 요령성 환인현(졸본성)과 길림성 집안현(국내성)을 거쳐 대동강(평양성)으로 남천했고, 발해는 두만강 북쪽 연변자치주 일대, 동예 옥저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동해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야무지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헌적인 근거가 전혀없고 고고학적으로도 실증이 되지 않는 가설과 상상이 반도사관과 결합하여 만들어 낸 허구의 역사이다.
서진시대에 진수(陳壽, 233년 ~ 297년)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부여(夫餘)ㆍ고구려(高句麗)ㆍ동옥저(東沃沮)ㆍ읍루(挹婁)ㆍ예(濊)ㆍ한(韓)ㆍ왜인(倭人)의 역사와 지리를 기술해 놓았다.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 읍루가 있으며, 서쪽으로 선비가 있다고 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하여 나라의 읍이 있다. 예로부터 백여개의 나라가 있어, 한나라 때에는 알현하는 자가 있었다.
한국 사학계의 통설은 바다(大海)는 무조건 동해바다로 해석하지만 <삼국지>에서 말하는 바다는 하북성을 면하고 있는 발해바다를 의미한다. 서기 3세기의 중국인들은 동해바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 이상은 중원인의 세계관이 미치지 않는 미답지역인데 하물며 만리이상 떨어진 연해주와 흑룡강의 존재를 알았겠는가?
개마대산은 함경도의 개마고원으로, 요동은 남만주 요령성 요하 이동으로, 대방은 황해도에 가져다 놓고 그 구도에 맞게 이들 나라를 적당하게 배치했다. 이런 연유로 한국 고대사는 허구의 역사라는 것이다. 지면관계상 일일이 분석은 생략하지만 이 나라들은 하북성과 내몽골 적봉시, 요령성 서부를 넘지 않았다.
옛 사서와 고고학적인 사료가 증명하는 우리 역사의 본향은 놀랍게도 하북성과 내몽골이다. 남만주 요동반도와 한반도 역사는 본향을 상실하고 민족이동이 된 후의 역사이다. <삼국사기>는 대륙사와 반도사를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반도사인 것처럼 기록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삼국의 이름만 전해지고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의 지명을 모아놓은 「삼국유명 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이 있어 삼국 대륙사의 희미한 그림자를 남겨 놓았다. 하북성 내몽골의 대륙사는 고려 중기이후 부터 인멸되었다.
3-2. 흑수 백산은 하북성과 내몽골 접경지대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하강했다는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만주 흑룡강과 백두산이 아니라 하북성 북부 승덕시와 내몽골 적봉시 경계지대를 가로지르는 칠로도산(七老圖山)의 광두산과 광정산 일대이다.
이곳은 고대 중국사서인 『국어(國語)』 · 『좌씨전(左氏傳)』 · 『일주서(逸周書)』 · 『사기(史記)』 · 『회남자(淮南子)』 · 『산해경(山海經)』 등에 숙신(肅愼), 식신(息愼), 직신(稷愼) 으로 불려졌던 유목계 북방민족이 거주했던 곳이다. 숙신이 물길-말갈-여진이 되어 흑룔강, 연해주 일대에 거주했다고 가르쳤지만 거란족에 밀려나기 전에는 수,당 시대까지도 이 지역에 거주했다. 환웅, 단군은 숙신 땅이었던 흑수 백산에서 나라를 건국했다. 조선과 숙신은 지역 종족적으로 동일한 원류이며 고구려와 삼한삼국사에 끊임없이 숙신 말갈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물길(勿吉)전에 "물길국(勿吉國)은 고구려(高句麗)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靺鞨)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는 속말부(粟末部)흑수부(黑水部)백산부(白山部)등 물길7부를 소개했다. 불열부(拂涅部)는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고 했다.그 나라 남쪽에 종태산(從太山)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太皇)이라는 뜻이다. 이 산이 백두산으로 옮기기전에 태백산, 장백산이었다.
이곳에 동북아의 시원문명이라고 인정되는 요하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유지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칠로도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서요하(시라무렌강)과 노합하 상류, 적봉시 부근에는 삼좌점(三座店) 하가점(夏家店) 상, 하층문화 유지가 있고, 우하량 동산취 유적은 칠로도산이 호로아호산과 만나는 조양시와 적봉시 경계지대에 있다. 우하량에서는 가부좌를 튼 여신상이 발견되어 고조선의 국모인 웅녀숭배사상을 반영한다. 적봉(赤峰)과 홍산(紅山)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밝달, 붉달'이다.
청동기문명을 대표하는 하가점 하, 상층문화는 고조선의 전기 후기시대와 고고학적으로 직결되어 있다. 1960년 적봉시 송산구 왕가점향 하가점촌에서 발굴된 유적으로 상하층 문화의 시기가 달라 고조선 전,후기로 구분된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하(夏)•상(商) 문화의 형성, 역사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나라 이전 하(夏)•상(商)은 고조선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내몽골 적봉시(赤峰市) 영성현(寧城縣)에 서기전 8세기 이후의 문명인 하가점 상층문화유지가 있다. 적봉시 영성현은 요령 하북 내몽골의 3성 접경지대이며 농업이 가능하다. 고조선을 입증할 수 있는 대표상표인 석곽묘(돌무지 무덤)가 출토된다. 중국의 묘제는 석곽묘가 아니라 흙으로 덮은 토광묘이다. 중국학계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외면하고 '동호족의 묘장'이라고 변명하지만 동호는 고조선의 다른 명칭이다. 동호 선비족 모용외가 서진때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졌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
요나라는 적봉시 영성현에 중경대정부 (中京大定府, 1120 ~ 1121년)를 두고 잠시동안 수도로 삼았다. <요사(遼史)> 예지(禮志)에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조선의 팔조범금(八條犯禁)의 가르침과 풍속을 모두 보존하고 있다(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고 했다. 영성현의 하가점 상층문화가 고조선 문명이 아니라면 영성현을 중경대정부로 삼았던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에 어찌하여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다"고 쓸 수 있겠는가?
3-3. 한, 당, 송은 하북성 중부를 넘어서지 못해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과 대표적인 중원의 통일제국인 한, 당, 송은 하북성 중부를 넘어서지 못했다. 전국시대 연나라는 연장성을 넘어서지 못했고, 진,한은 요수와 요동을 넘어서지 못했고 수,당은 발해와 갈석산, 평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612년, 수양제 양광은 고구려 침공조서에서 '발갈지간(渤碣之間)'과 '요예지경(遼濊之境)'을 고구려가 잠식했다고 한탄했다. 발갈은 발해와 갈석산이고 요예는 요수와 예수 두 강을 지칭한다. 발해와 갈석산 요수는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하며 예수는 보정시의 남쪽 120km 지점에 석가장시를 흐르는 호타하의 상류를 이른다.
『畿輔通志(기보통지)』에 “예하(濊河)는 평산현 북쪽에 있는데 방산(房山)에서 출원하여 동남으로 흘러 호타(滹沱)로 들어간다. 방산은 평산현 서북에 있고 예수(濊水)가 나온다. ”고 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방산(房山)은 산서성 양성현에 있는 왕옥산(王屋山)이다."고 했다. 예(濊)족이 거주하여 예하(濊河), 예수(濊水)라는 강이름이 생겼다.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와 『通典(통전)』에 “예(濊) 역시 조선땅이다.”고 했다.
예의 도읍지가 예읍(濊邑)이다. “고성(故城)은 지금의 하간부(河間府) 염산현(鹽山縣) 서북으로 옛 예읍(濊邑)이다”고 하였으며 춘추시대 제나라의 무체읍(無棣邑)이다. 한나라가 고성현(高城縣)을 두었다. 하북 고양현 동쪽에 있다. 즉 고양고성(高陽故城)이다고 했다. 고양(高陽)은 삼황오제 시대에 전욱 고양씨를 봉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예(濊)의 뿌리는 이처럼 역사가 길다. 고구려가 보정시를 넘어 서남쪽으로 석가장시의 호타하 상류와 동남으로는 하간부(河間府)에 이르렀다는 것을 수나라의 황제가 증언했다. 어떤 역사기록보다 값진 증언이다. 진나라 ~ 위진남북조의 시기까지 하간군 (河間郡)의 치소는 헌현(献县)이며 하북성 동남부 창주시와 형수시 중간에 위치했다.
당, 북송(北宋)과 거란의 경계선은 당시의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지금 하북성 보정시 북부이며 북경 서남쪽 100km 지점이다. 호삼성(胡三省)이 註한 <자치통감>에 당나라는 "평주(平州)에 자몽, 백랑, 창려 등의 수(戍)가 있으며, 모두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平州有紫䝉白狼昌黎等戍 盖平州之北境契丹之南界也)"라고 하였다. 수(戍)는 국경을 지키는 수자리이다.
3-4. 북경에 최초로 도읍한 나라는 금나라.
하북성을 온전하게 점령한 최초의 국가는 여진족 완안부 출신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이다. 북만주 하얼빈에서 건국한 금국은 불과 12년만에 하북성을 점령하고 북송을 강소성 회수 이남으로 밀어냈다. 금나라는 북경을 수도로 정한 최초의 나라이며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로 명명했다.
원이 금을 멸하고 중도를 불태우고 약간 북쪽에 대도(大都)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았다.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고 대도(大都)를 연경(燕京)이라고 고쳐 부르다가 아들 주체(영락제)가 남경으로부터 천도하고 최초로 북경(北京)이라고 명명했다. 이때가 1421년이므로 한족이 북경과 하북성을 온전하게 장악한 시점은 불과 800년밖에 지나지 않는다. 유사이래 장구한 세월동안 하북성은 고조선과 고구려 동이북방민족의 역사의 요람이었다. <계속>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