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지도. [출처= 나무위키]
만리장성 지도. [출처= 나무위키]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4. 연나라가 탈취한 고조선(번조선)에 설치한 연5군과 연장성.

유주의 속군 가운데 지도에 표시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은 서기전 3, 4세기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번조선)을 급습하여 천리를 물리치고 빼앗았던 영토이며 이 땅에 연5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았다.

<전국책> 연책(燕策)편에 전국시대의 유세객 소진이 연나라 문후를 만나 '燕東有朝鮮·遼東(연동유조선요동)', 즉 연나라 동쪽에 조선요동이 있다고 했다. 연나라가 동쪽에 인접한 조선을 치고 5군을 설치한 이래 이 지역은 유주, 평주로 지명이 변천되면서 고대 한중양국이 격돌하는 지점이 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고조선을 치고 연5군을 설치하기 이전 고대 연국은 지금 보정시 남쪽에 석가장시와 경계를 이루는 정주시와 보정시 서남쪽의 당현 사이에 위치했으며 조선이 버티고 있던 요동을 넘어서지 못했다.

연나라는 이곳을 지키기 위하여 상곡군 조양- 요동군 양평 구간에 연장성을 쌓고 5군을 설치했다. <사기> 조선열전은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복속시켰다."고 했다. 요동고새는 연장성을 지칭한다. 대체로 갈석산의 동쪽 기슭의 관문인 자형관 부근의 상곡군 조양에서 부터 갈석산에서 발원하는 요수를 따라 패수와 합수하는 양평군 지경까지 축성한 연장성을 경계로 조선과 중원국가가 대치하였다.

이 연장성을 수리하여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하여 연진장성(燕秦長城)이라고 불렸으며 만리장성의 동단이 되어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이 있고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樂浪 遂城縣有碣石.長城所起)"고 했던 것이다. 낙랑군 수성현은 전국시대 요동군 양평이며, 지금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으로 지명이 현존한다. 구글 지도상에 서수구 중심부에서 서쪽의 갈석산 방향에 위치한다.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요동을 수복하고 양평성을 요동성으로 바꿨다.

장성은 흔히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쌓았다는 만리장성을 연상한다. 그러나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 전국시대에 제(齊), 진(秦), 조(趙), 연(燕)은 각자 자국 방어에 필요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진, 조는 주로 북방의 훙노 기마부대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연나라는 조선을 물리치고 탈취한 연5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요동에 쌓았다. 진이 6국을 멸하고 전국시대에 각국이 쌓았던 장성을 수축하여 감숙성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연결한 장성을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조양-양평 구간의 연장성은 만리장성의 일부가 되어 그 동단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웅대한 규모의 장성과 관문은 진시황 당대에 축성한 것이 아니고 명나라가 대대적으로 수축한 것이다. 한국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북경 외곽의 팔달령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구간은 주원장이 장군 서달로 하여금 신축케한 명장성이다. 일부 고대사 연구자들은 전국시대의 연장성을 북경-산해관 구간의 명장성으로 오해하고 난하를 요수로 비정하고 있으나 축성한 시대가 다르다.

5. 유주를 분리하여 평주5군을 설치하다.

서진(西晉, 266-316)시대에는 요서군 일부를 분리하여 창려군을 만들고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 현토군과 함께 유주에서 떼어내 평주(平州)로 삼고 선비족 모용외를 평주자사로 삼았다. 유주로 부터 평주를 분리한 이유는 이곳은 대대로 한(漢)족이 아닌 오환 선비 고구려 등 동이계 북방민족이 거주하여 직접 통치가 어려운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유주를 표시한 지도의 심각한 문제점은 유주의 속군이 된 연5군이 북경과 천진을 넘어 하북성 북부, 만주 요령성까지 뻗어 있으며 옛 위만조선의 영토이었던 낙랑과 대방이 평안도 황해도까지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한나라가 만주 요령성을 넘어 한반도 서북부까지 점유했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을 실제로 지도상에 표시하고 그 지도를 받아서 한국 강단사학은 아무런 반론도 없이 좋다고 베껴쓴 것이다.

갈석산. 고대의 갈석산은 보정시 서쪽 태행산맥 중심부의 백석산과 동쪽 기슭의 낭아산으로 비정된다. 사진은 낭아산 전경이다.
갈석산. 고대의 갈석산은 보정시 서쪽 태행산맥 중심부의 백석산과 동쪽 기슭의 낭아산으로 비정된다. 사진은 낭아산 전경이다.

평주는 서진이 별도로 영토를 개척하고 설치한 것이 아니고 기존의 유주에서 떼어내 명칭만 바꾼 것이다. 창려군 역시 요서의 일부(옛 요동속국)과 요동의 서쪽을 분리한 행정구역이므로 연5군 가운데 요서 요동과 동일한 지역이며 오늘날 보정시 역현 일대이다. 창려현 서쪽 20리에 갈석산이 있었고, 서남쪽 60리에 유성현이 있었다고 하니 평주는 요동, 요수, 갈석산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갈석산은 [창려]현 서쪽 20리에 있었다.碣石山縣西二十里 『昌黎縣志』

영평부(永平府) 옛 기록 : 유성(柳城)은 창려현(昌黎縣) 서남쪽 60리에 있다. 한(漢)시기 오랫 동안 오환(烏桓)의 근거지이었으나 조조(曹操)가 멸하였다. [북]위(魏) 및 진(晉)시기를 지나며 모용씨(慕容氏) 부자의 근거지가 되었다. 수(隋)가 [유성]현을 설치하여 요서군에 소속시켰다. 당(唐)이 영주(營州)를 설치하였고, 원(元)이 폐하여 창려(昌黎)[현]에 편입하였다. 정안사(靜安社)가 되었다. 永平府舊志:柳城在昌黎縣西南六十里。漢永為烏桓所據,曹操滅之。歷魏、晉為慕容氏父子所據。隋置縣,屬遼西郡。唐置營州,元省入昌黎,為靜安社。

『日知錄』 권 31

평주 노룡현이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이유는 중국 정사에 이곳에 고대의 조선성과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고대의 중국인 스스로 조선과 고구려의 위치를 기록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사기록을 무시하고 문헌사료가 전혀 뒷받침이 되지않는 한반도 대동강 평양을 고집하는 강단사학의 학문적인 편협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선, 기자(箕子)를 뒤에 요(遼)의 낙랑에 봉하였다. 지금 평주(平州)의 노룡(盧龍)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그런 연유로 무덕(武徳, 618~626)년간에 요(遼)를 기주(箕州)로 삼았다. 8년 고구려 역시 그 지역이다. 朝鮮 箕子後封遼之樂浪 今平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徳以遼為箕州 八年 而髙麗亦其地

『路史』 권 27, 宋 羅泌 撰

조선성, 즉 은나라의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은 폐성이다.『太平寰宇記』 권 70, '平州' '盧龍縣'

진(晉)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 시기의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通鑑地理通釋』 권 10

양평(襄平)은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襄平 縣 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後漢書』 권 104 下, 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의 <후한서> 注

민족 사학계가 여러 문헌을 교차검증한 바에 의하면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패수 동쪽에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 언젠가는 고고학적인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평양성을 확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윤몰된 창해지도(1). 천진시에서 서쪽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다. 연장성이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 지구인의 고대사 공부방]
윤몰된 창해지도(1). 천진시에서 서쪽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다. 연장성이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 지구인의 고대사 공부방]

6. 낙양에서 요동군까지는 3600리.

<후한서>군국지 요동군조를 보면 후한의 도읍지 낙양에서 요동군까지 거리를 "3600리" 라고 써 놓았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실제로 이동하는 거리이므로 대략 40% 정도 곡률을 감안하고 직선기준으로 환산하면 넉넉잡아 800km 정도이다. 구글 지도상에 낙양을 중심으로 이 거리를 대입하면 북경과 천진을 넘어서지 못한다.

지도상에는 요령성 요하이동을 요동군으로 표시했는데 낙양에서 이곳까지는 7,000리가 넘어야 하므로 후한서 요동군조의 기사에 부합하지 아니한다. 중국사서를 한번만 읽어보았다면 단박에 거짓임을 알 수 있는데도 아무런 반론도 없이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 이유는 한국 고대사의 강역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동북공정과 그에 부용하는 한국강단사학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하북성 요동의 요수(遼水)를 남만주 요하(遼河로 옮겨 놓음으로써 요동의 위치를 순식간에 하북성 보정시 북부에서 요령성으로 수천리 밖으로 옮겨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요동의 지표지명인 갈석산에서 흐른다는 요)수도 없고 갈석산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연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병도는 만리장성을 황해도 수안까지 끌어다 놓았다. 이런 자를 한국 고대사의 태두라고 추종하고 그 학설을 지금까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사서를 읽고도 못본척 하는 함량미달 강단사학이 한사군 재한반도설을 포기하지 않는한 중국의 역사침탈은 계속될 것이다.  

7. 갈석산과 요수는 어디에 있었나?

한중 고대사에서 갈석과 요수는 대단히 중요한 지표지명이다. 윤내현 교수 이후 민족사학계는 갈석과 요수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지금까지 민족사학계는 진황도시 노룡현에 갈석산이 있고 산해관을 지나는 난하를 요수로 보고 요령성 요하설을 부정했다. 요하설보다는 진일보한 주장이지만 일부에서는 사서기록에 부합하지 않는 난하를 부정하고 북경 외곽을 흐르는 조하, 영정하, 심지어 하북성 남부의 호타하까지 거론했지만 이 역시 사서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자의적인 추정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심백강 원장이 '요수=역수설'을 제기한 이래 역수(易水)가 정설로 인정되는 추세이다. 역수(易水)는 세개의 물줄기가 있다. 보정시 역현(易縣)을 흐르는 북역수, 중역수가 있으며 그 중에 가장 남쪽에 서수구(徐水區)를 흐르는 남역수(南易水, 구글 지도상에 폭하)가 있다. 역수설을 더욱 구체화하여 남역수가 고대의 요수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요수(남역수)가 갈석산(낭아산, 혹은 백석산)에서 발원하고 연장성은 이 요수를 따라 갈석산의 상곡군 조양에서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까지 축성되었다. 이 요수의 동쪽이 요동이며 유주(幽州) 요동군이 위치했다. 남역수(폭하)는 현재 남만주 요하하고는 전혀 다른 물줄기이다. 이 폭하의 별명이 압록수이자 을지문덕 장군이 대첩을 거둔 살수이었다.

이곳에 한국 고대사의 지표지명인 갈석산과 연장성, 낙랑군 수성현, 패수, 압록수, 살수, 마자수, 염난수, 왕험성, 고구려의 평양성과 요동성이 위치했다. 마자수와 염난수는 요동군과 이웃한 현토군을 지나 바다(창해)로 들어간다.

창해지도(2).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창해 [본 지도 출처: 历史上冀中平原“塘泺”湖泊群的分布与水系结构, 邓辉,卜凡 (北京大学城市与环境学院历史地理研究所, 北京 100871), DOI: 10.11821/dlxb202011005, 地理学报 (ACTA GEOGRAPHICA SINICA) Vol.75, No.11 November, 2020. 지구인의 고대사 공부방에서 재인용함]
창해지도(2).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창해 [본 지도 출처: 历史上冀中平原“塘泺”湖泊群的分布与水系结构, 邓辉,卜凡 (北京大学城市与环境学院历史地理研究所, 北京 100871), DOI: 10.11821/dlxb202011005, 地理学报 (ACTA GEOGRAPHICA SINICA) Vol.75, No.11 November, 2020. 지구인의 고대사 공부방에서 재인용함]

8. 창해는 요동군 양평성 앞바다.

창해(蒼海)는 고대에 발해만이 윤몰되어 천진에서 하북성 내륙 보정시쪽으로 깊히 들어간 부분의 바다이며 발해의 일 부분이지만 지금 발해와는 다르다. 옛 바다의 흔적이 백양정(白洋淀)이라는 대습지로 남아 있다. 전국시대부터 수, 당대에 이르기까지 황하유로는 수차례 흐름을 바꿨으며 산동성 북부를 흘러 발해로 입해하는 지금과 달리 하북성 창해로 흘러 들었다.

<상서> 우공(禹貢)편에 "태행과 항산을 거쳐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太行恒山 至于碣石 入于海)"고 했는데 이 경우에 바다(海)는 발해가 아닌 창해이다. <사기집해>에 "공안국이 말하기를, 이 두산이 동북쪽으로 이어져 길게 뻗어, 갈석과 접하여 창해로 들어간다(此二山連延東北 接碣石而入于滄海)"고 바르게 주석했다. <회남자>에도 "갈석은 요서의 경계가 되는 바다 서쪽 해변에 있다(竭石在遼西界海水西畔)"고 했으나 학계통설은 바다를 창해가 아닌 발해로 오해하고 진황도시 노룡현에 갈석산을 갖다 놓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수서(隋書)>에 의하면, 수양제가 고구려를 칠 때에 내호아(來護兒)가 수군(水軍) 선단을 이끌고 창해를 건너 패수로 들어가니 평양과 60리 거리이다(遼東之役,護兒率樓船,指滄海,入自壩水,去平壤六十里)'고 했다. 평양을 특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록이지만 창해를 이해하지 못하면 발해 바닷가의 진황도시에 평양을 가져다 놓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바다를 잘못해석함으로써 한국 고대사 해석에 여러가지 오류를 야기시켰다. 한국 강단사학은 내호아가 건넜다는 창해를 발해의 연장선에서 황해바다로 해석하고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고 수나라 군대가 대동강 입구에서 평양성으로 향했다고 버젓이 가르쳤다. 위만에게 쫒겨난 준왕이 들어갔다는 바다를 황해바다로 해석하고 전라도 익산 마한으로 갔다고 해석했으나 창해를 건너 남쪽 후삼한의 대륙마한으로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창해는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했던 갈석산 가까이 요동군 양평성의 앞바다이었다. 조양-양평 구간의 연장성이 양평까지만 축성되었던 이유는 양평을 지나면 창해이었기 때문이다. <후한서>에이르기를,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하북성의)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학계통설은 요동군 양평성을 황당하게도 요령성 요양시에 가져다 놓았다.

9. 역사에서 미래한국이 나아갈 길을 찾아야.

지금까지 고찰한 것처럼 한국 사학계는 유주와 평주, 요동과 요수, 연장성과 양평성, 갈석산과 창해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결과 중국의 정사기록을 이해할 수 없었고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을 정확하게 짚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은 이렇게 한탄했다

"오호라!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여 망령되이 한사군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으로 끌어들이고, 억지로 사실과 맞추어 구구하게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아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고 하고,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니,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쪼그라들고 말았다(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

우리나라 역사는 이렇게 조작되고 왜곡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은 대륙국가의 상무정신과 진취성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싸우지도 않고 역사강역을 축소시키는 이런 황당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한국의 위대한 역사혼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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