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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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의 거짓말

이런데도 해동역사는 바다를 건너면 절대로 안된다는 사대모화에 찌든 김부식이란 유생이 <삼국사기>를 짓고 창해를 황해(서해)바다라고 강변했다.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인 듯'하고, '浿水'는 바로 대동강이다.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에는 "평양성은 한 나라의 낙랑군으로서 산굽이를 따라 성을 둘러쌓았고 남으로 패수가 놓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한지]에는 "등주에서 동북쪽 바다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수 양제의 동방 정벌 조서에는 "창해 방면 군사는 선박이 천 리에 뻗쳤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달리고 커다란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패강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에 다달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렇게 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백하며,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권37 잡지 제6

김부식 본인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고구려 본기에는 감히 올리지 못하고 잡지에 실었다. 김부식은 당시 통일신라의 서북지방 영토는 황해도에서 멈추지 않았고 남만주 요하 이서 요서지방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고려때까지도 남만주의 영토는 고려 속했다. 요동정벌에 심혈을 기울렸던 고려말기의 공민왕도 “요양(遼陽)은 원래 우리나라(고려)의 땅"이라고 말했다.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편찬되었는데 그보다 22년전인 1123년(인종 1)에 송(宋) 나라 서긍(徐兢)이 개경에 머무르다가 돌아가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고려 견문록을 썼다. 김부식을 불러 역사재판정에서 서긍과 대질신문을 해보면 김부식의 거짓말이 금방 들통날 것이다. 서긍(徐兢, 1091년~1153년)은 1123년(인종 1)에 고려를 방문했고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은 1126년과 1127년에 북송을 방문하였으니 사실상 동시대인이다.

<고려도경>이 전해주는 고려 국경은?

<고려도경> 봉경(封境)편에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맞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 지역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금[大金]과 맞닿아있다........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하남성 개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가는데 모두 3,790리(里)이다."고 하였다.

봉경(封境)편 말미에 요수는 물길이 얕아 견고하지 못하여 고려가 압록강의 동쪽으로 물러나 국경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말갈에서 발원하는 압록강[鴨綠水]은 그 물빛이 오리 머릿빛[鴨頭]과 같아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요동(遼東)과는 500리 떨어져 있는데 국내성(國內城)을 거치면서 다시 서쪽으로 한 강물과 합류하여 흐르는데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이 두 강물이 합쳐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것이 가장 큰 강이다. 물결은 맑고[淸澈] 지나치는 나루터[津濟]에는 큰 배를 댈 수 있다. 고려에서는 이 곳을 천혜의 요충지[天塹]로 여기는데 폭이 300보에 이를 정도로 넓다. 평양성(平壤城)에서는 서북쪽으로 450리이며 요수(遼水)의 동남쪽으로는 480리에 있다.

요(遼)의 동쪽은 곧 옛날 거란에 속했던 지역인데 현재는 사람들[虜衆]이 이미 흩어진 상태이다. 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여서 다시 성을 세워 수비하지 않고 다만 오가는 길목으로 삼았을 뿐이다. 압록의 서쪽으로는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라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리(里)를 흐른 곳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니 이것이 바로 요수(遼水)이다.

당 정관(貞觀) 연간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격파하고 물을 건널 때 그 물이 얕고 좁은 것이 괴이하여 물으니 이곳이 요수(遼水)의 수원(水源)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옛날에는 요수를 견고하다고 믿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려가 압록강의 동쪽으로 물러나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이유이다."

요해(遼海)는 지금 발해이다. 발해를 남쪽에 두었으니 공민왕이 “요양(遼陽)은 원래 우리나라(고려)의 땅"이라고 한 말과 <고려도경> 기록은 일치한다.

하북성 보정시 북부의 패수와 고조선 왕검성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파란선이 패수(지금 계조하)이며 오른쪽의 파란 부분은 고대의 창해바다(지금 백양정 습지)이다. 
하북성 보정시 북부의 패수와 고조선 왕검성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파란선이 패수(지금 계조하)이며 오른쪽의 파란 부분은 고대의 창해바다(지금 백양정 습지)이다. 

고려 국경은 하남성 개봉(開封)에서 3790리

고려의 국경이 송나라 수도인 변경(汴京, 지금 하남성 개봉)에서 동북방향으로 3,790리라고 정확하게 밝혔다. "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하남성 개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를 거친 다음 요수(遼水)를 건너[陸走渡遼] 동쪽으로 고려 국경까지 간다"고 하였다.

연산(燕山)은 일반적으로 북경일대를 지칭하는 듯하나 이것은 후대에 옮겨진 탓이며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의 실제위치는 한(漢)이 유주(幽州)의 치소로 삼은 계현(薊縣)이며 지금 보정시 당현(唐縣)이다. 당현을 지나 요수를 건너 평양이 위치하였다. 따라서 <고려도경>에 계현(지금 보정시 당현)으로 가는 연산도를 거친 다음 요수를 건넜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나당 전쟁시에 말갈출신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평양에서 거병한 고구려 부흥군 검모잠을 공격하였다. 즉 연산도를 통해서 고구려 평양에 이르렀다.

<후한서> 군국지 요동군조에 후한의 수도 낙양에서 요동군까지의 거리가 3,600리라고 하였다. 낙양과 개봉은 황하 남쪽의 하남성에 위치하고 있으며 개봉은 낙양에서 정주를 거쳐 동쪽으로 불과 110km 거리에 있어 동북쪽에 조금 가깝다. 이 작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고려 국경은 고대의 하북성 요동군을 크게 벗어 나지 않았으며 북경, 천진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현행 국사 교과서의 신의주-함흥선에서 멈춰버린 고려 엉토하고는 너무나 다른 기록이다.

하남성 낙양은 중국 13개 왕조의 수도로서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다. 반면에 북송의 수도인 개봉은 중국의 7대 고도인 서안, 낙양, 개봉 , 항주, 북경, 남경, 안양의 하나이며 북송 시대에는 인구 100만이 넘는 번영한 도시답지 않게 지금은 쇠락하여 기억에서 사라진 도시이다.

고려 국경은 황암수(黃嵓水)와 압록수(鴨綠水, 鴨淥水)

<고려도경> 봉경편에 "압록의 서쪽으로는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라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몇 리(里)를 흐른 곳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니 이것이 바로 요수(遼水)이다."고 하였다. 즉 백랑수와 황암수는 요수의 상류라는 것이다. 고려때의 압록수(鴨綠水, 鴨淥水)는 대다수가 지금 압록강이나 요하와 혼동하고 있으나 혼동강(混同江), 흑룡강(黑龍江), 속말수(粟末水)는 모두 압록수의 이칭이며, 지금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일대를 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서수구(徐水區) 소재 폭하(瀑河), 즉 남역수(南易水) 에 비정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고려의 서쪽경계인 요수(遼水)는 지금 하북성 역현과 서수구를 흐르는 남역수이다. 요수의 상류인 황암수(黃嵓水) 역시 明나라와 고려말기의 경계선이었다는 사실이 明나라 오사도(烏斯道)가 고려 사신을 환송하는 '送高麗相還國 (환국하는 고려 대신을 배웅하다)'에 나타난다. <출처, 고려 말 명나라와의 국경 - 압록수(鴨綠水) 위치 비정 5부. 지구인의 고대사 공부방>

琛貢中朝使節持,樂浪人物好威儀。

보배로운 공물 지닌 조정의 사절, 낙랑 사람의 위엄 있는 차림새가 훌륭하도다.

董生作傅曾匡國,季札來賓解聽詩。

동생((董仲舒)은 사부돼어 일찍이 나라를 바로잡고, 계찰(춘추시대 오나라의 공자)은 손님에게 시를 풀어 들려주었네.

喜動龍顏天咫尺,行經鰲背路倭遲。

기쁜 빛이 용안에 있으니 천자 나라 지척이어, 자라 등 길 지나 멀리 돌아오셨구나.

陽春不隔黃岩水,歸及看花二月時。

정월에 황암수(黃岩水) 얼지 않았으니, 귀환하실 2월에는 꽃을 보시리라.

『春草齋集』 권4

*鰲背路(자라 등 길) : 고구려 건국 신화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주몽이 엄사수(淹㴲水)를 건널 수 있었다고 전한다.

*오사도(烏斯道)의 시에 등장하는 고려 대신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오사도가 명(明)나라 초기 주원장 홍무제(洪武帝, 1368-1398) 때의 인물인 점을 감안하면 시의 배경이 고려 말기임은 분명하다. 참고로 사신으로 명(明)에 갔던 설장수(偰長壽)가 1388년 2월 (음)에 돌아와 명(明)의 철령위(鐵嶺衛) 설치 통고를 전하였다.

명나라 초기의 수도는 강소성 남경이었으며 오사도는 절강성 소흥인(紹興人)으로 문인이었다. 하남성 개봉에 거주하면서 하남성 태수 전문경(田文景)을 위해서 일했다. 이런 이유로 개봉에서 고려 국경인 황암수(黃岩水)까지 배웅하고 송별시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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