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가 설치한 동녕부(東寧府)는 고려영토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로 부터 100여년 후인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고려 서경은 고구려의 평양이었고 배신자들이 원나라에 바친 땅이 지금 하북성 북부의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이었다. 원 세조는 이땅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했다.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원나라에 바치기 이전에 생존했던 김부식이 고구려 평양을 몰랐다는 것은 한국사 최대의 사기극이다.
북애자 선생의 김부식 비판
조선조 숙종연간에 <규원사화>를 저술하여 환인,환웅, 단군의 실사를 전해주신 북애자 선생께서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김부식은 무려 3천년 가까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지 '평양'을 단 한줄로 묵살시켜 버렸다. 한국사의 척추에 해당하는 평양의 위치만 바로 잡아도 우리 역사의 90%는 제대로 설 수 있으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지금 강단학노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무릇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묘청의 요사스러움과 서경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本神人王儉之宅)」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발해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수,당군의 집결지는 하북성 유주 계현, 탁군, 갈석산과 요수
중국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수,당이 고구려 평양을 칠 때에 육군과 수군이 함께 병진했는데, 육군주력은 황제가 직접 통솔하고 유주 계현, 탁군, 갈석산과 요수방면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산동반도에서 출발한 수군부대는 보급물자를 싣고 발해를 북상하여 창해로 들어가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평양에 다다랐다는 이야기이다. 유주 계현, 탁군, 갈석산과 요수는 모조리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있다.
창해는 渤海의 내륙해이고 지금 보정시 역현 및 서수구(徐水區)와 용성현(容城縣) 동남쪽에 白洋淀이라는 대습지로 변한 곳이 옛 창해이다. 창해는 발해의 일부분으로 내륙해이었던 셈이다. 이것을 뒤집고 창해를 황해로, 패수를 대동강으로 조작한 책이 한국의 유일한 관찬정사라고 하는 <삼국사기>이니 그로인한 막심한 폐단은 형언불가 수준이다.
이때 고구려 평양은 창해를 거슬러 올라가서 보정시 북부 서수구, 정흥현에 있었고 수나라 장수 내호아가 수군을 이끌고 창해를 거슬러 올라가 '浿水'에 진입하니 60리 지점에 평양이 있었다고 중국 <수서>기록에 당당하게 나와 있다. 고려 당시에 이미<수서> <북사>가 다 있었음에도 중국사서를 보고 반을 베낀 것이 <삼국사기>인데 이 기록을 못본척하고 '浿水'가 대동강이고 대동강에 평양이 있다고 쓴 자가 사대유생 김부식이다.
패수는 동쪽으로 흐르는데 대동강은 서해바다로 흘러들어
『수경(水經)』 '浿水'조에 보면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는데 대동강은 서쪽 서해바다로 들어간다.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조선을 건국한 위만이 동쪽으로 달아나 새를 나와(東走出塞) 패수를 건넜다(渡浿水)고 했다. 위만이 황해도에서 패수를 건넜다면 북쪽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방향이 안맞는다.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북상투에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요동의) 새(塞)를 나와서 패수를 건너가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살았다. "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史記』'朝鮮列傳'
막말로 패수와 평양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서기전 2세기 역사책에 사마천이 '조선열전'을 쓸 필요가 없는 나라밖의 역사이었다. 그리고 연나라 장수 위만도 뭣하러 가까운 흉노로 도망가지 바다건너 머나먼 한반도로 와서 대동강을 건넜겠는가?
창해를 기록한 <사기> <한서> <후한서>
이 외에도 창해는 중국의 <사기> <한서> <후한서>에 나온다. 이 창해가 강릉 앞바다인지 관심있는 분들은 공부 삼아 일독을 권하니 읽고 역사문맹을 탈피하기 바란다.
1) 사마천 <사기(史記)> 卷三十 평준서(平準書)
팽오가 조선을 매수하여 멸하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이 소란스러웠다.
[원문]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주).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는 한반도가 될 수 없고 하북성과 산동성 사이이니 창해군은 한반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2) 반고의 <한서(漢書)> 卷六 무제기(武帝紀) 第六.
원삭元朔 원년(BC 128) 동이(東夷)의 군장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주). 우리 역사책에 나오는 예, 동예가 함경도가 아니라 하북성 창해군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3)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 동예東濊)」 』
한무제 원삭 원년(B.C.128)에 예(濊)의 임금(君) 남려(南閭)가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러 예속하므로, (한)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만에 폐지하였다.
[원문] 元朔元年(B.C.128), 武帝年也. 濊君南閭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예군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에 반대하여 한나라 요동군으로 예속했는데 무제가 그 땅을 장부상으로 창해군을 삼았으나 실질적으로는 다스리지 못하고 폐지했다는 내용이다. 한민족의 고대 국가이었던 예(濊), 위만조선이 지금 하북성 요동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 요령성 요하 동쪽의 요동반도기 아니라 하북성 요수 동서 양쪽을 지칭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옥저(沃沮)를 두만강 하구 함경도에 갖다놓고 예(濊)는 함흥이나 강릉으로 옮겨 놓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부여, 고구려, 옥저, 예, 한, 왜는 전부 하북성 산동성 일대에 위치한 한민족의 고대국가이었다. 이 나라들을 모조리 만주 한반도 왜 열도로 옮겨 놓은 역사가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소위 반도역사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반쪽통일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평양은 신라가 차지했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동안 대당전쟁을 수행하고 마침내 하북성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몰아내고 완전한 삼국통일를 이룩했다. 유사사학은 대동강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있었다고 가르쳤다. 대당전쟁은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격전지이었던 오골성(烏骨城), 건안성(建安城: 개평), 호로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은 대동강 주변에는 없는 지명이다. 672년 7월에 신라는 마침내 평양을 점령했다.
발해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고토를 반분하다
696년에는 당나라 요서지역의 영주(營州)도독부에서 거란연맹의 수장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틈에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던 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는 698년에 발해를 건국했다. 고구려 멸망후 딱 30년후에 하북성의 옛 숙신(肅愼)땅 홀한주(忽汗州) 동모산(東牟山)에서 발해가 일어나 신라와 고구려 영토를 반분했다.
713년에 당 현종 이융기가 발해에 사신을 다시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에, 무왕을 계루군왕(桂婁郡王)에 봉했다. 홀한주와 계루부는 발해의 근원을 시사하는 중요한 명칭이다.
계루부(桂婁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왕을 배출했다. 홀한주(忽汗州)는 우리말 '해임금의 나라'를 음차표기한 명칭이다. '홀(忽)'은 태양의 고대어인 '하라'의 줄임말이며, 한(汗)은 칸,군(君)으로 왕이다. 즉 해임금, 해왕이다. 부여의 성씨가 해(태양)씨이니 부여왕은 홀한(忽汗)이며, 옛 부여땅을 홀한주라고 불렀다. 즉 발해는 부여와 고구려의 옛 땅에서 흥기하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당나라는 이런 사실을 알고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과 계루군왕(桂婁郡王)에 책봉하였다.
홀한하(忽汗河), 홀한해(忽汗海)는 창해(滄海)
홀한해는 옛 유주 요동군 양평성 앞바다이었다. 조조가 갈석산에 올라 바라보고 '관창해(觀滄海)'를 읊은 바다이다. 고구려가 양평성을 점령하고 요동성으로 바꿨다. 수,당이 요수를 건너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 요동성이었다.
이 바다를 끼고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의 지표지명인 갈석산과 요수, 평양이 위치했다. 하북성 발해(渤海)와 창해(滄海)는 홀한하(忽汗河), 홀한해(忽汗海)로서 개천이래 배달국,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 배달 한민족의 요람터이었다.
유사사학은 일제 식민사학과 합작으로 홀한주를 길림성 송화강 일대에 갖다놓고 홀한하(忽汗河)를 두만강 북쪽에 모란강이라고 강변하면서 발해를 만주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진국이 국호로 삼았던 발해(渤海)가 만주 길림성의 바다이었던가?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의 첫 귀절이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로 시작한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고 발해는 멸망후에 고려로 귀부했으니 하북성 평양은 고려가 서경이라고 불렀고 요심(遼瀋)땅도 고려 영토로 귀속되었다. 한국사는 단절되지 않았고 환웅천왕이 개천한 이래 고조선, 부여, 삼한삼국, 고려,조선까지 하북성과 만주 일원은 우리나라의 영토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은 조선은 싸우지도 않고 강토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했다.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호라!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여 망령되이 한사군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으로 끌어들이고, 억지로 사실과 맞추어 구구하게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아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고 하고,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니,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쪼그라들고 말았다(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