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해(滄海)와 우리 역사 이야기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고 봉건제를 폐지하고 불가피하게 일국지배체제를 추구하다보니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옛 6국의 하나이었던 韓나라 귀족이었던 장량이 복수하기 위하여 <滄海力士>를 데리고 박랑사(博浪沙)라는 곳에서 진시황을 암살할려다가 실패했다. 이름도 바꾸고 숨어다니다가 반란군 유방 휘하에 들어가서 드디어 진을 멸하고 漢이 천하를 재통일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그런데 滄海가 한반도 동해바다이고 이 엄청난 사고를 친 주인공이 강원도 강릉의 滄海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한국 고대사를 한반도 안으로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반도의 유사사학 건달들이 창해를 한반도의 바다로 조작할려다가 부수적으로 만들어진 기막힌 작품이다. 인천이 비류(沸流)가 도읍했던 미추홀이라고 미추홀구라는 행정구역을 만들어 기념하는 행태와 똑같다. 온조(溫祚)가 도읍했다는 한수이남의 하남 위례성은 큰물만 지면 성이 침수되는 풍납토성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의 출발점은 반쪽짜리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에서 비롯한다. 이 책을 유일정사라고 신봉하는 반도의 유사사학 건달들을 위해서 滄海와 관련된 우리역사는 꼭 짚어줘야겠다는 생각이다. 대다수 연구자들도 평양과 패수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지만 우리 역사의 감추어진 보고인 滄海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북성 중남부에 漢나라 때에 滄海郡이 있다. 지금도 하북성 천진시에서 서남쪽으로 90km에 滄州市가 있다. 이 滄海郡과 滄州市 일대가 고대의 창해이었다. 창해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라는 인식과 달리 육지와 바다가 뒤썪여 마치 물 창고(倉庫)처럼 물을 가두어 둔듯한 내륙해이었다. 그래서 氵(水)部(삼수변부)를 붙여서 滄海라고 불렀다.
창해의 뜻도 모르고 한국에서 박사네 뭐네 하고 아는 척하는 유사역사가들이 넘쳐 나고 이들을 추종하는 부나방들도 많다. 이 자들은 창해를 강릉이나 함흥 앞바다에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동해로 여기고 창해역사를 강릉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정당화시키고 반론을 막기위하여 <滄海力士>의 창해는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의 창해와는 다르단다. 득도한 수준으로 중국의 일차사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억지논리인데 과연 다른지 한번 살펴보자.
후한말 건안 12년(207) 가을 8월, 조조(曹操)가 유성(柳城)에서 오환(烏桓)을 대파하고 오환의 지도자 답돈(蹋頓)을 참(斬)했다. 북방을 평정하고 개선하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흥에 겨워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지었다. 혹자는 고대에 우리나라를 '해동(海東)'이라고 불렀고 '영동(嶺東) 7현(縣)'이 대관령 동쪽으로 비정되니 동쪽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동해안이 맞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갈석산은 강원도에 없다. 조조가 태백산을 갈석산으로 착각하고 강릉 앞바다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갈석에 이르러 푸른 바다를 바라보네(東臨碣石 以觀滄海)"라고 읊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해역사가 진시황 저격을 시도했던 博浪沙라는 곳은 장량의 고국인 韓나라 도읍지인 지금 중국 하남성 황하남쪽 정주시의 현급 행정구역인 新郑市에 있다. 창해역사가 살았다는 강릉은 한반도 동해안의 도시이다. 황하유역에 거주하던 장량이 태백산맥 너머 한반도의 구석진 강릉에 거주하는 힘센 사람 소문을 어떻게 들었으며, 2천년전에 비행기로 공수한 것도 아니고 어느 겨를에 강릉의 창해역사가 중국땅 황하까지 날라갔겠는가? 이런 광신자들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복수심에 불타던 장량은 황하를 건너 멀지않은 고조선땅인 하북성 창해에 '힘이 장사인 사람'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창해역사를 접촉해서 자객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강역이 하북성 중남부에 까지 이르렀던 고조선과 전국시대의 중원국가는 인접했고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했다는 이야기다.
창해역사 이이야기는 고대 한중교류사의 한 장으로 눈 녹은 진훍땅에 새겨진 기러기 발자욱처럼 이름도 모르는 인걸은 갔지만 창해에 남겨진 역사는 후세에 길이 전한다.
고구려와 수,당 전쟁에 등장하는 창해
수,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에도 滄海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대동강 평양학파들은 기절초풍하겠지만 고구려 평양과 60리 거리에 창해와 패수 입구가 있다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수나라 장수 내호아가 누선을 이끌고 滄海로 갔다고 <수서>와 <북사> <삼국사기>에 적혀있다. 이런 놀라운 기록이 있다면 벌떼처럼 달라붙어 연구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눈감고 못본척 한다.
"요동전쟁에 (내)호아(護兒)가 누선을 이끌고 창해(滄海)로 가서 패수(浿水)에 진입하니 평양까지의 거리가 60리였다."
<원문> 遼東之役 護兒率樓船 指滄海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隋書』권 64, '來護兒'
"좌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수백리에 달하는 강회(江淮) 수군의 선단을 이끌고 나아가 바다를 통하여 먼저 패수(浿水)에 진입하니 평양까지의 거리가 60리였다."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삼국사기』권 20, 고구려본기 '영양왕 嬰陽王'
고,수 전쟁을 '요동전쟁(遼東之役)'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평양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일러주는데도 <삼국사기>에 까지 인용해 놓고도 유사 역사가들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평양이 한반도가 아니라 하북성 창해에 가까운 요동에 있었다는 말이다. 대동강 평양을 요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대동강 평양학파들은 이 패수가 대동강이라고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박박 우긴다. 가짜 패수와 평양을 팔아서 먹고사는 생계형 역사를 업으로 삼기 때문이다. 창해(滄海)와 패수(浿水)가 어디에 있는지 아래 지도를 꼭 참조하고 대동강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滄海는 고-당 전쟁시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신라 문무대왕한테 군량지원을 요청하는 대목에도 나온다. 이 내용은 유사사학 박사들도 그냥 지나치는 창해관련 기록인데 처음으로 인용한다.
“저는〔황제의〕명을 받고 만리나 되는 滄海를 건너 적을 토벌하고자 해안에 배를 댄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습니다. 대왕의 군사는 도착하지 않고 군량을 주고받는 길마저 이어지지 않아 그 위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는 그 대책을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원문> 我受命, 萬里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粮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유신 장군, 소정방에게 군량을 공급하다.
이 편지를 받고 662년, 문무왕 2년 2월 6일에 김유신 장군이 68세의 나이로 한 겨울에 하북성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 소정방에게 쌀 4,000석과 조(租) 2만여 석의 군량을 수레 2,000대에 싣고 9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수송작전에 성공한다. 군량 무게만 총 3천톤이라고 한다. 소정방에게 별도로 은 5,700푼, 세포(細布) 30필, 두발 30냥, 우황 19냥을 주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행군경로를 보면 661년 12월10일, 고구려 경내에 진입하고 이듬해 문무왕 2년(662) 1월23일 한겨울에 김유신 부대는 七重河에 이르렀다. 662년 2월 6일에 군량을 전달했으니 고구려 경계에 들어서서 2달만에 수송을 완료했다. 대동강 평양학파들은 칠중하를 임진강이라고 하는데 고구려 경계에 들어서서 40일만에 임진강을 도하했다면 신라 고구려 경계선은 한강보다 훨씬 남쪽이어야 하는데 어디였을까? 경상도? 현해탄? 그리고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를 지나면 바로 대동강 평양인데 13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거리는 고속도로 기준으로 179km이다.
문제는 이 부실한 <삼국사기> 기록만으로는 의심은 가지만 평양을 특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평양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김부식의 행태로 보아 원전인 <구삼국사> 원문을 전체를 옮기지 않고 취사선택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평양성 전투에서 당군은 대패하고 소정방은 아까운 신라의 군량만 받아먹고 싸우지도 않고 철군했다. 옥저도(沃沮道) 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에서 연개소문과 싸워 전군이 죽었는데, 이때 그의 아들 13명과 더불어 모두 전사하였으니 엄청난 패전이었다. 방효태가 전사한 사수(蛇水)는 대동강 평양 주변에 아무리 찾아봐도 안나온다. 옥저도(沃沮道) 총관, 요동도(遼東道) 대총관은 평양으로 진공하는 방면군 사령관을 뜻하는데 평양주변에는 옥저나 요동이란 지명이 없다. 661년 당군(唐軍)이 마읍산(馬邑山)을 점령하고 난 후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하였다고 했는데 대동강 평양 주변에 마읍이란 지명은 없다. <계속>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