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혁 유엔피스코 사무총장
허준혁 유엔피스코 사무총장

두음법칙, 세종 철학을 거꾸로 뒤집다

영어에는 Love(러브), Romance(로맨스) 등 L과 R로 시작하는 단어가 많다. R로 시작하는 단어는 약 1만 개, L로 시작하는 단어는 약 7천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어 단어 첫소리에서 ‘ㄹ’은 수백 년간 추방됐다. 한자 첫소리 변경을 규정한 두음법칙(국어 규범 제7조 제10~12항)에 따른 결과다.

두음법칙은 조선 후기 유교적 언어관과 일제의 식민 언어정책이 결합된 산물이다. 유교 사회는 단어 첫머리의 ‘녀’와 ‘ㄹ’을 천하거나 부정하다고 여겨 배제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발음 편의를 위해 ‘녀→여’, ‘리→이’, ‘로→노’로 바꾸었다. 같은 ‘ㄴ’임에도 ‘남자’는 그대로 두고 ‘녀자’만 ‘여자’로 바뀐 것은 성별 권력의 흔적이다.

결국 두음법칙은 세종대왕의 “소리 나는 대로 적으라”는 훈민정음 정신을 거슬러, 소리를 사회적 규범과 외부 권력에 맞춰 억제한 제도라 할 수 있다. 한글이 ‘소리의 그릇’이라면, 두음법칙은 그 그릇에 뚜껑을 덮은 셈이다.

남북 표기 차이도 주목할 만하다. 남한은 ‘노동’, ‘여자’라 쓰지만, 북한은 ‘로동’, ‘녀자’로 표기한다. 오히려 북한식 표기가 세종의 원리에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콩글리시와 일본식 영어의 뿌리

영어 L과 R 발음은 한국어에서는 모두 ‘ㄹ’로 표기하지만, L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치조음인데 비해 R은 혀를 말아 올리는 중설음으로 외국에서는 발음이 분명히 구별된다.

세종은 병서(竝書)와 연서(連書)를 통해 소리의 강도와 연속성을 문자로 설계했다. 병서는 같은 자음을 나란히 써서 된소리를 표현(ㅂ+ㅂ=ㅃ, ㄷ+ㄷ=ㄸ)하는 것이며, 연서는 겹받침을 통해 혀 움직임과 공기 흐름을 글자에 반영하는 것이다. 밝다, 읽다, 읊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원리를 외래어 표기에 적용하면 L와 R, TH, J와 Z 발음 등을 정교하게 구분할 수 있다. 즉, 병서와 연서의 부활은 단순 복고가 아니라 21세기 외래어 표기 혁신의 핵심이다.

일본어는 받침 발음이 거의 없어 외래어를 대부분 모음 u(う), 우리말로는 'ㅜ'를 넣어 늘인다. 빌딩을 '비루딩구', 앨범을 '아루바무', 맥도널드를 '마꾸도나루도'라고 발음하는게 그러하다.

한국어는 종성이 가능하지만, 복합 받침 표기가 제한되어 일본식 'ㅜ' 대신 ‘ㅡ’를 끼워 넣어 결과적으로 외래어 발음이 일본과 유사해진다. 월드, 콘서트 등 굳이 발음하지 않아도 되는 끝발음까지 표기함으로써 발음상 ‘콩글리시’가 되어버린다. 즉, 콩글리쉬는 일본식 음운 체계를 매개로 형성된 불량품의 일환이다.

연서와 병서의 부활로 되살려야 할 ‘소리의 과학’

훈민정음 창제 당시 글자는 총 28자가 있었지만, 현재 종성으로 쓸 수 있는 것은 ㄱ·ㄴ·ㄷ·ㄹ·ㅁ·ㅂ·ㅇ 7개로 제한되어 있다. 영어 ‘world’의 ld종성은 ‘ㄹㄷ’이라는 겹받침으로 표기하면 되지만, 현대 한글은 두 자음을 병기하지 못하고 ‘월드’처럼 ‘ㅡ’를 넣는다. 이로 인해 원음의 마찰과 폐쇄음이 사라지고, 어색한 발음이 탄생한다.

이러한 받침 문제도 세종이 설계한 병서와 연서를 따르면 간단히 해결된다. ‘world’를 ‘월ㄷ’로 적거나 겹받침을 통하면 되는 것이다.

현행 맞춤법과 외래어 규범은 세종의 언어 철학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두음법칙과 외래어 표기 경직성은 한국어 소리 다양성을 제한하고, L과 R, P와 F, B와 V, J와 Z, TH 등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세종대왕은 글자를 ‘소리의 그릇’으로 설계했지 소리를 글자에 가두기 위한 틀로 만들지 않았다. 이제 훈민정음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병서와 연서 원리 부활, 두음법칙 개혁, 외래어를 ‘있는 그대로의 소리’로 표기 등을 통해 한글은 다시 세종의 언어와 글자, 그리고 인류의 언어와 글자로, 글로벌 언어 시스템으로 거듭나야 한다.

세종께서 오늘날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를 보신다면, 이렇게 깊이 개탄하실 것이다.

“백성의 말은 그 입에서 나오고, 글자는 그 소리를 따라야 하거늘, 어찌 그 입을 막고, 그 귀를 가리려 하느냐.”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