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재외기자.
박춘태 재외기자.

또다시, 비가 내린다.

남반구 겨울의 한복판, 뉴질랜드 남섬의 작은 도시 넬슨(Nelson). 그 곁의 모투에카강(Motueka River)이 넘쳐흐르며 들판은 바다처럼 잠기고, 도로 위는 진흙과 혼돈의 강물이 뒤엉킨다. 신문에 실린 한 문장이 눈을 붙잡는다.

“Further rain is the last thing we need.” 

더 이상의 비는, 정말이지 필요 없다는 절박한 외침.

잠겨버린 울타리와 떠내려간 농장 시설, 그리고 시민을 향해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호소하는 경찰과 소방관의 얼굴. “상식적으로 행동해주세요.”  “구조 자원을, 진짜로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주세요.”  그 말들은 형식적인 경고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려는 마지막 부탁처럼 다가온다.

이곳 뉴질랜드는 재난 앞에서 공동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위험이 닥치면, 정부기관, 부족, 시민사회가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태후누이 부족은 해안가에 ‘라후(Rāhui, community shelter)’라는 쉼터를 열고, 낯선 이들을 가족처럼 맞이한다.  긴급지원센터에는 복지 담당자, 보험사 직원, 부족 신탁 대표까지 나와 실질적인 상담을 제공한다. 이들은 말한다.  “이곳은 단지 대피소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원스톱 공동체’여야 합니다.” 삶과 자연, 사람과 제도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는 풍경이다.

2022년 여름. 서울 강남의 도로가 순식간에 강으로 바뀌었던 그 밤. 

도심 속 물살에 휩쓸리던 차들, 발이 묶인 시민들, 그리고 그들 곁에 조용히 나타난 이름 모를 손길들. 비를 뚫고 가재도구를 꺼내주는 자원봉사자, 임시 대피소에서 따뜻한 국과 밥 한 그릇을 나누는 주민들. 그날도, 한국은 ‘함께’였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문을 열고, 등을 내어주며, 공동체의 울타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도 마주하게 된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자연을 인간의 통제 너머에 있다고 받아들인다.

태후누이 부족의 대표는 말한다.  “강이 넘치면, 우리는 신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일까. 이곳 경찰은 반복해 말한다.  “경고 표지판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구조 자원을 남겨주십시오.”

이는 단지 생존을 위한 조언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약속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문화, 그리고 ‘나’보다 ‘우리’를 먼저 떠올리는 태도. 이곳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럽다.

반면 한국은, 오랜 세월 동안 ‘빨리빨리’라는 가치를 품고 달려왔다. 위험 앞에서도 “나만은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표지판을 넘는 사람들. 비용과 효율, 속도를 중시하다 보니 개인의 안전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은 종종 뒷전으로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도 바뀌고 있다.

2023년, 경북 예천의 홍수. 자원봉사자, 군인, 공무원, 그리고 주민이 한마음으로 마을을 복구해내는 그 모습은, 뉴질랜드의 어느 비 내리는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점점 더, 함께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배워가고 있다.

재난은, 인간의 작고 연약한 본질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물은 모든 것을 휩쓸지만, 인간의 마음만은 잠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낯선 이를 향한 열린 문 하나, 빗속을 뚫고 달려간 손길. 그 모든 것이 위기의 밤을 견디게 하고, 공동체의 내일을 가능케 한다.

“당신은 재난이 닥쳤을 때, 누구를 먼저 떠올릴 것인가?”

“내가 누구를 도와야 할까”라는 질문이 “누가 나를 도와줄까”라는 질문보다 먼저 떠오르는 사회, 그곳에 진정한 공공성과 감동이 자란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비가 멈추지 않는 이 시대에, 무력한 개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연대하는 공동체로 설 것인가.

뉴질랜드는 우리에게 말한다. “서로를 지켜달라.”  “상식적으로 행동하라.”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당신의 여백을 남겨달라.” 

이 작은 목소리들이 국경을 넘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닿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