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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빚과 빌다
조현용 교수  |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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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22  13: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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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책을 읽다가 인도유럽어나 잉카어 등에서 <빚>에 해당하는 단어가 범죄나 잘못과 어원이 같다는 부분에서 갑자기 우리말 <빌다>가 떠올랐다. 여러분은 빚이 있는가? 어떤 빚이 있는가? 우리는 물질적인 것만을 빚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 때도 빚을 졌다고 한다. 어쩌면 은혜라는 말은 빚의 고급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다. 빚을 갚는다는 말이나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 그다지 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은 그게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참 불편하다.

빚이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는 어렵다. 빚이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사회를 잇는다. 불편하게. 빚이 폭력을 부르고, 빚이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빚이 사람은 살인으로 이끌기도 하고, 자살로 몰아가기도 한다. 범죄의 대부분이 빚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빚과 죄가 어원적으로 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빚이 범죄가 되는 것이다.

빚을 지면 자꾸 봐달라고 빌게 된다. 빚이라는 것은 원래 빌린 것이라는 뜻이다. 빌리다의 원 단어는 빌다이다. ‘빌어먹다’ 등의 표현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빌다는 어원적으로 빚과 관련이 있는 것을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빌다라는 단어가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의 빌다와 음이 같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단순히 동음이의어라 생각했었지만, 빚과 죄나 잘못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말의 빌다도 빚과 용서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었을 수 있겠다.

우리는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물질적으로 보면 빚은 착취의 좋은 구실이 된다. 빚은 구렁텅이라고 표현할 만큼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한 번 빚을 지면 갚기가 힘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빚을 지고, 갚고 하는 것이 자유롭다면 사람들은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상황을 보면 빚의 시작이 게으름이 아닌 경우도 많다. 겨우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천재지변을 당하게 되면 빚을 진다. 가뭄이 들어 빚을 지게 되고, 홍수가 나서 빚을 지게 된다. 빚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게을러서 빚을 지었는가? 열심히 살았지만 등록금 때문에 빚을 지고 집세 때문에 빚을 진다. 우리가 빚을 지는 게 우리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억울한 측면이 많다. 평생을 부지런히 살아도 빚만 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답답한 일이 아닌가? 청년들도 빚이 많다. 어디 청년뿐이랴? 나라도 빚더미다.

정신적인 빚은 어떤가? 우린 누구에게 정신적인 빚을 졌는가? 아마도 우리에게 정신적인 빚을 가장 강조하는 사람들은 종교인일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죄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전생에 죄도 우리 책임이고 우리의 조상이 지었을지도 모르는 죄도 우리의 책임이다.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은 죄만으로도 속죄가 벅찬데, 나도 모르는 죄까지 내가 갚아야 한다니 어깨가 천근만근이다. 나도 기억나지 않는 은혜도 또 다른 빚으로 다가온다.

이런 은혜 혹은 죄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은 비는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고 빈다. 은혜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빌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죄를 갚겠다고 빈다. 빚을 탕감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지 않은 빚은 좀 탕감해 주었으면 한다. 내가 진 빚도 시간을 두고 갚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면 한다. 빚이 범죄를 불러서는 안 된다. 빚을 받으려고 하는 이가 오히려 큰 범죄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은 새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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