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8월 5일의 히로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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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8월 5일의 히로시마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7.08.0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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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히로시마는 복잡한 곳이다. 거리나 풍경이 아니라 생각이 복잡해지는 곳이다. 누구나 히로시마라고 하면 ‘원폭’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원자폭탄이 세계에서 제일 먼저 투하되었던 도시 히로시마는 참혹함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이다. 히로시마에서는 이 원폭을 평화의 이미지로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당시는 출근 시간이었고, 장소 또한 시내 중심지여서 희생이 더 컸다. 약 2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있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었다.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끔찍함과 비참함이 더 두렵게 다가온다.

폭탄이 투하된 8월 6일에는 매년 히로시마에서 추도식이 열린다. 일본 수상부터 많은 사람이 애도하는 모임이다. 2016년에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추도식에 참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한국인의 희생도 언급했다.

추도식에 대해서는 일본과 미국, 주변국의 평가가 다르다. 근본적으로 슬픔이 가득한 모임이다. 그런데 감정이 복잡하다. 이 복잡함을 알아야 평화가 온다. 히로시마 원폭 자료관과 평화공원에 갔을 때 여러 생각이 들었다. 많은 방문자들이 저마다의 생각과 모습으로 히로시마에 와 있었다. 민족과 국적에 따라 생각이 전혀 다를 것이다.

일본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의 끔찍함을 돌아보고  평화를 기원하고 있으리라. 어떤 마음에는 복수나 분노가 차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대한 분노와 애국심이 섞여있을 수도 있다. 미국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히로시마에 올까?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평화를 기원하겠지만 어떤 이는 원폭이 아니었다면 더 큰 희생이 있었을 것이라 위안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이나 대만, 동남아시아인 희생자들도 있었다고 하니 이런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떨까?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일본이 패망했을 때 한국인들은 춤을 췄을 수도 있다. 드디어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곧 히로시마에서 희생당한 이들 중에서 10%에 해당하는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라고 슬프고 서러웠을까? 남의 나라 땅에서 이유 없이 죽어간 영령들의 한이 크게 다가온다.

▲ 히로시마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복잡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히로시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한국인 위령비가 있다. 이 위령비는 민단 등에서 모금하여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평화공원 안에도 세울 수 없었다. 1999년이 되어서야 겨우 지금의 자리로 옮겨올 수 있었다고 한다.

히로시마의 한국인은 민족의 차별과 함께 원폭 피해자로서도 차별을 받았다고 하니 고통에 고통이 더해진 무게가 힘겹게 다가온다. 한국인이라 말하지 못하고, 원폭 피해자라 말 못하는 아픔이 느껴진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원폭피해자에 대한 시선, 배제가 아프다. 현재까지도 한국 원폭 피해자의 규모를 밝히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하니 숨어 살아온 삶의 무게가 더 무겁다.

매년 8월 5일은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가 열린다. 희생자의 가족, 민단 등에서도 모이지만 점점 일본인들의 참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위령탑 앞에 고개 숙이고 함께 평화를 꿈꾸고, 이를 위해 함께 행동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8월 5일의 히로시마는 아픈 평화다. 히로시마에 갈 일이 있다면 꼭 한국인 위령탑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 앞에서 차별과 배제와 폭력이 없는 세상을 위해 잠깐이라도 머리 숙여 기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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