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구려와 한나라의 요동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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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구려와 한나라의 요동 전쟁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4.2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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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요동을 둘러싼 고구려와 한나라의 공방

2천년 전, 북부여를 이어 받아 고구려를 창건한 고추모대왕은 고조선의 옛 강역을 되찾는 ‘다물’을 국가 목표로 하였으나, 열강에 둘러싸인 국제정세 속에서 힘든 건국과정을 견뎌야 했다. 유류왕, 대주류왕, 민중왕을 지나 5대 모본왕에 이르러, 고구려와 한나라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선비’와 ‘오환’을 설득해서 연합하여 한나라를 침공하고 승전하여 한나라의 항복을 받았다.

 

한나라는 평화 조건으로 ‘요동’을 고구려 영토로 인정하고, 매년 2억 7천 만전(錢)을 고구려와 선비, 오환에게 바치기로 협약했다. 그 이후 한나라가 ‘반초’의 서역 정벌과 ‘두헌’의 흉노 정벌에 성공하고 유라시아 대륙의 초강대국이 되자, 유일하게 남은 적대세력인 고구려를 제압하고자 평화협약을 폐기하고 기원 105년 고구려를 침공한다.

 

고구려 승전하고 요동 전지역 차지

개전 당시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 재위시대였고, 당대의 영웅인 그 아들 ‘수성’이 34세의 총사령관으로 '17년 전쟁'을 지휘했다. 태조대왕은 탁월한 외교역량으로 선비, 오환, 백제, 예를 모두 설득하여 막강 고구려군의 선봉돌파에 이어 여러 나라의 군대가 고구려의 지휘로 한나라의 요동지역과 그 후방을 초토화했다. 국력을 총동원해서 공격해왔던 한나라는 기원 121년에 마침내 항복하고 ‘고구려의 요동 영유권’을 영구히 인정하고 2억 7천만전의 세폐도 다시 지급하기로 협약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강토인 ‘오열홀(요동)’을 되찾아 제 1차 전성시대를 열었고, 그 이후 7대 차대왕(수성), 8대 신대왕(백고), 9대 고국천왕에 이르기까지 요동지방(북경지역 포함) 전 지역을 지배하여 전성기의 한나라와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나 고국천왕이 기원 197년에 후손이 없이 죽자 국제정세를 뒤집는 대변고가 일어났다. 요동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고국천왕의 친동생 ‘발기’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건의 전모를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요약 발췌한다.



고국천왕의 죽음

기원 197년에 고국천왕이 죽고 그를 이을 후손이 없었다. 권력욕이 강한 왕후 우씨가 '좌가려의 난' 이후로 고국천왕의 징계를 받아 정치에 입을 벌리지 못하고 답답하게 궁중에 처박혀 있다가, 왕이 죽자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할 열망으로 애통해 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면서 국왕의 상사를 감추고 발표하지 않은 채, 그날 밤 미복 차림으로 비밀리에 왕의 첫째 아우인 '발기'의 집을 찾아가서, “대왕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후계자가 될 자가 아니냐.”고 하면서 그를 꾀이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순나부의 고추가로서 환도성간(환도성의 성장)을 겸하여 요동 전체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그 위세와 권력이 혁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약 고국천왕이 돌아간다면 당당하게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자기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엄정한 어조로 우씨를 질책하여, “왕위는 천명이니 부인이 물을 바가 아니며, 부인의 야행은 예가 아니므로 왕후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다.”고 하였다.

이에 우씨가 크게 부끄럽고 또 분하여 그 길로 곧 왕의 둘째 아우인 연우를 찾아가서, 왕이 죽은 사실과 발기를 찾아갔다가 핀잔을 들은 경위를 낱낱이 하소하니, 연우가 크게 기뻐하며 우씨를 맞아들여 밤에 주연을 베풀었다. 연우가 손수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치자 우씨가 치마끈을 끊어 싸매 주었다. 야연을 마친 후 함께 손목을 잡고 입궁하여 그날 밤 동숙하였다.



발기의 반란과 요동 상실

다음날 고국천왕의 죽음을 발표하는 동시에, 왕의 유언을 조작하여 연우를 왕의 후계로 삼고, 당일 왕위에 즉위하였다. 발기는 아우인 연우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격문을 띄워서 연우가 우씨와 밀통하여 차례를 건너뛰어 왕위를 참칭한 죄를 폭로하고, 순나부의 병력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그러나 서로 격전을 벌인 지 3일이 지났으나 나라 안 사람들로 발기를 돕는 자가 없었으므로 패하여, 발기는 순나부 소속의 3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 전 땅을 들어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투항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공손도는 한말의 효웅이니, 기원 190년에 한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조짐을 보고는 요동태수가 되어 요동에서 왕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이때 요동의 모든 땅은 차대왕이 점령한 뒤였으므로 고구려의 소유였고, 한의 요동은 지금의 난주로 옮겨서 토지가 매우 협소하였다.

그래서 공손도는 항상 고구려의 요동을 엿보아 왔는데, 이때 마침 싸우지도 않고 발기의 항복을 받게 되자 크게 기뻐하면서 드디어 정예병 3만을 동원하여 발기의 투항한 군사들을 선봉으로 삼아 고구려로 침입하여, 차대왕의 북벌군의 본영이던 환도성(제1의 환도)에 들어가 성읍과 부락들을 소탕하고, 비류강으로 향하여 졸본성을 공격하였다.

연우왕이 자기 동생 계수를 ‘신치’ 전군총사령으로 삼아 항전하여 한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좌원까지 추격하니, 발기가 다급해져서 계수를 돌아보며, “계수야, 네가 차마 너의 장형을 죽이려느냐. 불의한 연우를 위하여 너의 장형을 죽이려느냐.”고 하였다.

계수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연우가 비록 불의하다고 하나, 너는 외국에 항복하여 외국의 군사들을 끌어들여 조상과 부모의 강토를 유린하였으니, 연우보다도 네가 더 불의하지 않으냐.”라고 하니, 발기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후회하고 배천(비류강)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요동을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

발기가 일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죄를 지었으나, 계수의 한 마디에 양심이 회복되어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팔아버린 오열홀, 곧 요동은 회복하지 못하여 공손도의 소유가 되었다. 이리하여 공손도는 드디어 요동왕이라 자칭하고, 전 요동의 땅을 나누어 요동•요중•요서로 나누어 세 지역을 만들고, 바다를 건너 동래의 여러 군(산동성 연태 등지)들을 점령하여 일시에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였다.

이에 연우왕(10대 산상왕)은 지금의 환인현 혼강 상류(지금의 안고성)로 환도성을 옮겨 쌓고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곧 ‘제2의 환도’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제 1차 전성시대는 끝나고 중쇠(中衰)시대가 시작되어 기원 391년 광개토태왕이 즉위할 때까지 2백년 간 고달픈 역사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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