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이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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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이두문'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1.2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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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이두문'
 
▲ 이형모 발행인
 우리나라와 중국은 땅이 붙어 있으므로 양 민족은 역사기록이 있기 이전부터 서로 왕래가 있었을 것이며, 한자의 수입도 역사 기록 이전의 일임이 명백하다. 단군왕검이 부루태자를 보내어 ‘도산’에서 중국 순 임금의 치수책임자 우 사공에게 치수 법을 전수할 때 금간옥첩의 문자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 문자는 한자일 것이다.
 
 그 뒤에 한자의 음(音)과 뜻(義)을 빌려서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임금’을 ‘王儉(왕검)’으로 번역하여, 왕은 글자의 뜻<임금>에서 소리의 초반을 취하여 ‘님’으로 읽고, ‘儉(검)은 글자의 소리<검>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었다.
 
 그리고 ‘펴라’(평양의 옛말)를 ‘낙랑(樂浪)으로 번역하여, 樂(낙)은 글자의 뜻<편하다>에서 소리의 초반을 취하여 ’펴‘로 읽고, 浪(랑)은 글자의 소리<랑>에서 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이니,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 같다.
 
 그림이 발전하여 상형문자가 되고, 상형문자가 발전하여 소리글자가 되는 것은 인류문화사의 통칙이니, 상형문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소리글자인 ‘이두문’을 만든 것은 마치 페니키아인들이 이집트 상형문자의 글자조각을 가져다가 ‘알파벳’을 만든 것과 같은 예로 문자역사에 커다란 진보라고 할 수 있다. 후세에 거란문자, 여진문자, 일본문자가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문화에 기여한 공덕이 크다고 하겠다. 
 
 먼 후대에 이르러 소리글자 ‘이두문’의 한계를 통찰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함으로써 “11,000개의 소리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소리글자의 완성품을 인류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두문이 전하는 고조선의 중심축 
 
 상고시대 이래로 우리말과 역사는 이두문으로 기록되었다가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이두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원래의 우리말을 바르게 알기 어렵다. 
 
 옛 역사서에서 단군 때에 ‘신지(神誌)’라는 사관이 있다고 했는데, 신지는 ‘신치, 신크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며 오가(다섯 장관)의 수석대신으로서, ‘신수두’의 제삿날에 우주창조의 신화와 영웅이야기, 예언과 경고를 노래했다.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한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 ‘신지(神誌)’이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 고조선의 중심축인 삼경(三京)을 설명하는 <신지> ‘비사’의 일부가 한시 1구(句) 5글자씩 10줄이 적혀 있는데, 원래는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전해오던 것을 한학이 흥성하던 삼국말엽에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다시 한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의 중심 강역 세 곳을 저울대로 비유하면) 마치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과 같은데, 저울대는 ‘부소량’, 저울추는 ‘오덕지’, 저울판은 ‘백아강’에 해당한다. 찾아오고 항복해온 나라가 70개국이니, 그 덕에 의지하여 단군의 정신을 지켜나갔다. 우두머리와 말미가 같은 위치에서 균형을 이루니, 나라가 흥성하여 태평을 누렸다. 그러나 만약 이들 삼경(三京)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왕업은 쇠하여 기울어질 것이다.”
 
 고조선 대단군의 서울 세 곳(三京)은 다음과 같다. 상경(上京)은 지금의 ‘하얼빈’이니, 고사(古史)에 부소량, 부소갑, 비서갑, 또는 아사달로 기록된 곳이다. 중경(中京)은 지금의 ‘해성·개평’ 등지로서 심양의 아래쪽인데, 고사에 오덕지, 오비지, 아지홀, 또는 안시성으로 기록된 곳이다. 남경(南京)은 지금의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 낙랑, 평원 또는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아사달(阿斯達)은 이두문에서 로 읽었는데 ‘소나무 산(松山)’으로 지금의 하얼빈에 있는 완달산이 곧 아사달이다. 고조선은 단군왕검 이래로 시의에 따라 삼경 중에 하나를 골라서 서울을 삼았지만, 그 본부는 어디까지나 하얼빈의 완달산으로 단군조선의 상경이고 후대에는 북부여의 중심지역이 된다. 
 
-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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