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종루와 보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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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종루와 보신각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1.1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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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해마다 한 해가 저무는 날 밤에는 시민들은 종로 보신각에 모여 송구영신의 종소리를 듣는다. 새해를 여는 ‘희망의 종소리’는 크게 울린다.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세계 각지로 울려 퍼진다. 일 년에 한번 모든 한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보신각 종소리의 옛날 모습은 어떠했을까? 홍승민 선생의 책 ‘우리 궁궐 이야기’에서 발췌, 소개한다.
 
 

 

 서울 한복판에 세운 장엄한 상징건물

 남대문에서 출발한 남대문로는 종각 네거리에서 종로와 만난다. 남대문로와 종로가 만나는 네거리 동남쪽 모퉁이에 종각이 있다. 지금은 그것을 종각이라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종루라고 하였다. 종루가 처음 지어진 것은 1396년(태조 5년)이다. 지금의 인사동 입구쯤에 있던 청운교 서쪽에 정면 5간에 2층짜리 누각을 짓고 종을 걸었다. 

 그러다가 서울의 중심 가로를 따라 상가나 관가, 창고 등으로 쓸 대규모의 행랑을 짓던 1413년(태종 13년)에 종묘 남쪽 길에 고쳐지었다가, 다시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다. 그 무렵에는 종루에 누기(漏器), 곧 물시계를 함께 설치하여 그것이 알려주는 시각에 따라 종을 쳤다. 

 그러나 시각을 재는 누기가 정확하지 못한데다가 그 담당자가 착오를 일으키면 관원이나 민간인들의 도성 출입까지도 이르거나 늦는 수가 많았으므로 1437년(세종 19년)에는 경복궁 안에 있는 ‘자격루’에서 잰 시각을 종루로 전달하였다. 전달을 위하여 지금의 광화문 앞에 쇠북을 설치하였다가 1459년(세조 5년)에는 종각을 지었다. 

 1440년(세종 22년)에 가서는 기존의 종루를 헐고 동서 5간, 남북 4간에 2층으로 고쳐 지어 위층에 종을 달고 아래층으로는 인마가 다니게 하였다. 이 종루는 서울 한복판에 높이 솟아 서울의 상징이 되는 장엄한 것이었다.
 
 

 고종32년(1895년) 보신각으로 이름 짓다

 그렇게 위용을 자랑하던 종루는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지고, 거기 달려 있던 종은 깨진 채 흙 속에 묻혔다.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그 종을 녹여 다른 데 썼다. 그 후 광해군 때 종루를 다시 짓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전처럼 장엄하게 2층의 누각을 짓지는 못하고 단층 종각으로 지었다. 

 몇 차례 고쳐 지으면서 전해 내려오다가 1895년(고종 32년)에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인의예지신’ 오상 가운데 사대문 이름에 붙은 인의예지 -흥인(동쪽), 돈의(서쪽), 숭례(남쪽), 홍지(북쪽) - 외에 마지막 ‘신(信)’자를 넣어 서울의 중앙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리라.

 이것이 1915년 길을 넓히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렸다. 그 종각은 6ㆍ25 때 파괴되어 1953년에 다시 뒤로 조금 더 물려 중건하였다. 지금의 종각은 1979년에 중건한 것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된 정면 5간 측면 4간의 2층 누각이다.

 1970년대 초반 지하철 1호선 공사를 할 때 원 종루의 주춧돌이 나와 지금 민속박물관 동남쪽 앞뜰에 옮겨져 있다. 주춧돌 하나하나의 크기도 크기려니와 그 개수와 출토 당시의 간격 등으로 미루어보면 종루가 대단히 장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종루가 지금은 한갓 돌덩어리 여남은 개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 모습을 잃었듯이 그 명칭조차도 오늘날에는 종루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종각이라 부른다. 하지만 종루와 종각은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다. 한자로 ‘루(樓)’란 지면에서 한 길 정도 떨어진 마루집이거나, 이층집의 이층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각(閣)’은 단층의 단촐한 집이거나, 이층집의 일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것은 ‘종각’이 아니라 ‘종루’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서울 사람들의 생활 중심

 종루-보신각은 이름에 표현된 관념상으로만 서울의 중앙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위치로 보아도 서울의 가장 중심이 되는 두 가로, 남대문로와 운종가가 만나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종루에서 치는 종은 시각을 알려주는 기능을 했다. 오늘날처럼 집집마다 개인마다 시계를 갖고 있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이 종루의 종소리는 하루 일상생활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밤이 되었다. 하루 생활을 마감하라, 성문을 닫는다.’는 뜻으로 하늘의 기본 별자리 수를 따라 스물여덟 번을 치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밝는다, 하루 생활을 시작하라, 성문을 연다.’는 뜻으로 불교의 33천에서 따와 서른세 번을 치는 파루(罷漏)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소리였다. 

 상상해 보시라. 궁궐에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광화문 앞을 비롯해 몇 군데에서 그것을 받아 종루에 알리고, 다시 종루의 종소리를 받아 사대문을 비롯한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서울의 새벽과 저녁을. 그 시대에는 오늘날 같은 소음이 없었으므로 그 소리는 은은하면서도 장엄한 타악기 연주로 서울의 하늘을 채웠을 것이요, 서울 사람들의 마음을 충만히 채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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