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백제 동성대왕의 해외경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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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백제 동성대왕의 해외경략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5.11.2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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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웅진 천도

▲ 이형모 발행인백제의 웅진 천도

 백제 근개루왕 시대에 고구려 장수태왕은 ‘한반도 남진정책’으로 군사를 일으켜 백제 신위례성을 공격했다. ‘대고구려 공수동맹’을 맺은 신라의 ‘자비마립간’이 1만의 병사를 보내어 백제를 구원하고자 했으나 ‘근개루왕’은 이미 전사하고 신위례성은 파괴되어 아들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문주왕이 곰나루(웅진)로 천도한 뒤 4년 만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 ‘해구’에게 죽었다. 문주왕의 맏아들로 13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임근왕은 다음해에 좌평 진남, 덕솔, 진로 등과 밀모하여 반신 해구를 처형한 영명한 임금이었으나, 3년 만에 15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동성대왕 즉위

 그 해(기원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하였으니, 대왕의 이름은 ‘마모대(摩牟大)’이다. 그는 임근왕의 사촌동생으로 즉위 당시의 연령은 14, 15세로 추측된다.

 대왕은 어린 나이로 난국을 당하였지만 천품이 숙성하였고 백발백중의 활솜씨가 있어서 고구려와 위(魏)를 물리쳐서 국난을 평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너 중국의 산동, 절강 등지를 점령하였으며, 일본을 쳐서 속국으로 만들었다.

 장수태왕의 음모와 위병(魏兵)의 침입

 당시 중국은 황하 남북으로 갈려서 위(魏), 제(齊) 양국으로 분립했고 ‘위’가 강력했다. 그런데 장수태왕이 ‘남방 4국 동맹’과 동성대왕의 출현으로 인하여 백제를 병탄하지 못하자, 제3국인 중국의 ‘위’를 선동하여 먼저 백제를 쳐 없애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자 ‘예실불’을 보내어 “사비 부여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라(지금의 제주도)에는 명주연못이 있는데 보물이 무한정 많습니다. 여지껏 그 보물들을 캐서 폐하에게 선물하였던 것인데, 이제 사비 부여는 백제의 서울이 되었고, 섭라도 백제에게 정복되어 더 이상 보물을 구경할 수 없게 되어 빈손으로 왔습니다.” 위나라의 군신들이 그의 말을 곧이듣고 황금산과 명주연못의 명주를 캘 욕심으로 백제를 침략했다.

 두 번에 걸친 위나라의 백제침략은 동성대왕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끝났다. ‘위서(魏書)’에는 패전의 수치를 감추기 위하여 이를 기록해 놓지 않았고, ‘삼국사기’는 백제의 공로와 업적을 시기하여 그 사적을 삭제한 ‘신라의 기록’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므로 이를 기록해 놓지 못하였다.

 오직 ‘남제서(南齊書)’에 그 대개가 기록되었었으나, 그것도 당태종이 찢어버려서 그 대부분은 빠져 없어지고, 겨우 동성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國書)가 남아 있어서 그 사실의 단편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국서의 내용에 따르면,

 “기원 490년에 ‘위’가 두 차례나 보병과 기병 수십만을 내어 백제를 침입했다. 동성대왕이 첫 번째 싸움에서 용맹한 4 장수의 군단을 보내어 위병을 맞아 대파하였다. 두 번째 전투에서도 다른 4 장수를 보내어 위병을 격파하고 수만 명의 목을 베었다.”

 “두 차례의 대승리를 얻고 나서 동성대왕은 국서와 우격(새의 깃을 꽂은 격문)을 내외 각국에 보내어 이를 과시하였다. 그리고 두 차례 대전의 승리에 힘입어 국운을 만회하고 마침내 해외경략의 터를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외경략- 중국 월주(越州)와 왜(倭)

 조선 역대 이래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자는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과 ‘동성대왕’ 양대 뿐이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광대하였기 때문에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에서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기를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려(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르렀다.”라고 했는데, 월주는 양자강 남쪽 ‘회계(會稽)’로,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 소유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월왕 구천의 고도를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의 땅”이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고려’는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부른 이름으로,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 서쪽, 곧 봉천 서부가 다 백제의 소유였다.

 ‘만주원류고’에 “금주, 의주, 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왜(倭)’는 지금의 일본으로 ‘구당서’ 상기 구절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성대왕은 이 같이 전공을 이루었으나, 홍수와 한발의 재해를 돌보지 않고 큰 궁궐을 짓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 기원 501년 11월에 사비 부여의 마포촌에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대설(大雪)을 만나서 그 곳에 머물렀는데, 그때 왕을 원망하는 좌평 가림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이 찌른 칼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때가 재위 23년, 당시 그의 연령은 40세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상고사(단재 신채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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