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조선의 균전제(均田制)와 중국의 정전제(井田制)
상태바
[역사산책] 조선의 균전제(均田制)와 중국의 정전제(井田制)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3.24 09: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형모 발행인

기원 1세기 동북아 정세는 한나라가 중국의 통일제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조선의 형세는 고구려와 북부여가 큰 나라로서 열국들 중에 위세를 떨쳤다. 고구려는 후방에 있는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늘 한나라와 다투었는데, 당시에 한나라 외척에 ‘왕망’이란 괴걸이 나타나 집권하고 혁명을 시도했다. 


왕망의 토지개혁 혁명

왕망의 목표는 첫째, 고대 사회주의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둘째,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함으로써,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고자 시도하여 중국 본국뿐만 아니라 조선 열국까지도 영향을 받는 대사건이었다. 

수천 년 역사에서 군웅 쟁탈과 왕조 교체기에 흔히 “요역을 줄이고 세금 부과를 가볍게 함”을 내걸고 혜택을 베푸는 정치를 잠시 하다가 옛 제도를 회복하는 악순환은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고루 분배하여 빈부의 계급을 없애려는 정책을 대담하게 실행하였으니, 이 사건은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 있다. 

정전설(井田說)은 중국의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원전 5세기)에 극도의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당시 열국들의 경쟁상황에서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끝없는 전쟁으로 조세 부담은 높아갔으며,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토지를 겸병(兼倂)하여 인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곤궁해졌기 때문에 이를 구제하려고 유약, 맹자 등 일부 학자들이 토지평균설(土地平均說), 곧 정전설을 주창했다.


중국 정전제는 십일세

그들의 말에 의하면 중국의 하, 상, 주 3대가 다 정전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제도는, 9백 묘의 밭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나누어 여덟 가구에 각 1백 묘씩 주어 경작하게 한다. 가운데 있는 1백 묘는 공전(公田)이라고 하여 함께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공용으로 쓰며, 각자에게 분배된 사전(私田) 1백 묘에서 나는 수확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제도인데, 이것을 십일세(十一稅)라고 한다.

그런데 선대의 성왕은 다시 나오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 시대가 되자, 모든 제후와 왕들은 그 인민들로부터 더 많은 부세를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정전제도를 철폐하는 동시에 정전제도에 관한 문서들까지 없애버렸다고 한다. 

어느 민족이든 원시공산제 단계의 사회가 있었음은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공인하는 바인데, 중국도 물론 태고에는 균전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약과 맹자가 주창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목격하거나 혹은 전해 듣고 이를 모방하려고 한 것이고, 저들이 자백한 바와 같이, 중국 자체의 옛 문헌에 근거해서 말한 것은 아니다.


조선 균전제는 이십일세

다만, 조선의 균전제는 여덟 가구가 한 전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8가동전(八家同田)’이 아니라, 네 가구가 한 전지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4가동전(四家同田)’ 방식이었다. 이것은 지금의 평양이나 경주에 남아 있는 한자 「器(기)」자 모양의 옛 전지에 의해 충분히 증명된다. 그리고 그 세제는 10분지 1을 취하는 ‘십일세’가 아니라, 20분지 1을 취하는 ‘이십일세’였다.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바 ‘맥국에서는 20분지 1을 세금으로 거둔다.’라고 한 것이 이를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저들이 ‘4가동전’제를 ‘8가동전’제로 고치고, 20분지 1세제를 10분지 1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했다. 자존적 근성이 깊은 중국인들은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중국 선대 성왕들이 남긴 제도라고 거짓 칭탁하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夷貉)이라 부르고, 조선의 정전제는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했다. 

<춘추>의 공양전·곡량전이나 <맹자>에서 동일하게 ‘세금이 10분지 1보다 적은 것은 대맥과 소맥의 제도이다’라고 하였으며, ‘맥국에서는 오곡이 자라지 않고 단지 기장만 자란다.…백관이나 담당 관리를 부양할 일이 없으므로 20분지 1만 받아도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엽의 <오월춘추>에는 “하나라 우왕(夏禹)의 공전(公田)이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왕망의 몰락과 정전제의 실패

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큰소리로 주창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민중을 움직여서 부귀계급을 타파하려던 운동이 아니었다. 오직 군주나 귀족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기득권을 버리고 그 소유를 민중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려고 했던 것이므로, 민간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군주나 귀족들은 권력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한편 주변 국가들에게 ‘한문화’를 강요하는 왕망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여 조선의 열국들, 곧 북부여, 고구려 등은 대 왕망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한나라의 변경을 자주 침입하자, 이에 왕망이 대 조선, 대 흉노 전쟁을 위하여 세금 징수를 증가시키고 인부들을 징발하자 전 중국이 소란해졌다. 부자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빈민들도 무리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였으므로, 왕망은 마침내 패망하고 정전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