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왕권정치와 벌족공치
상태바
[역사산책] 왕권정치와 벌족공치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4.07 15: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형모 발행인

고구려의 제1차 전성시대는 제6대 태조대왕(재위 94년)과 제7대 차대왕(재위20년)이 다스리던, 기원 53년부터 165년까지 113년간 이어졌다. 천하무적의 맹장 ‘차대왕’은 76세에 부친 태조대왕의 선위를 받아 20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專制)정치를 실행하다가, 연나조의(椽那皂衣) ‘명림답부’에게 시해(弑害) 당하였다.


   명림답부의 반란과 벌족공치 회귀

명림답부의 반란세력은 차대왕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 차대왕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도모하였던 귀족들로서, 차대왕과 함께 20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기원 165년 3월에 선왕인 태조대왕이 죽자 10월에 차대왕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차대왕은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君權)만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며 전제정치를 시행하였다. 이에 연나부의 ‘선배’영수인 명림답부가 그 본부의 ‘선배’로서 밖에서 세력을 모아 반기를 들고, ‘어지류’등 귀족들이 안에서 호응하여, 태조의 죽음을 기회로 차대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벌족공치(閥族共治)의 나라를 회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원래 1인의 전제정치가 아니고 여러 큰 가문의 종족들이 함께 다스리는 ‘벌족공치’의 나라였다. 따라서 국가 기밀대사는 왕이 전결하지 못하고 왕과 5부의 대관들이 대회의를 열어 결정했다. 신가(국무총리) 선임이나 ‘사형’등의 형벌 결정이 그러하다.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 속에 숨어 있던 동생 ‘백고’를 세워 신대왕이라 부르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려서 차대왕의 태자 추안까지 사면하여 양국군에 봉하고, 차대왕이 제정한 준엄한 형법들을 폐지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고 승복하였다. 

이에 명림답부는 「신가」가 되어 군국 대소사를 모두 통할하고, 「팔치」와 「발치」를 겸임하며, 예·량 등 여러 맥족의 부장들을 아울러 다스리니, 그 위력과 권세가 태조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하였다. 


   고구려와 한나라의 3차 요동전쟁 

기원 169년에 한나라가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을 현토태수에 임명하여 대거 침입해 들어왔다. 이에 명림답부가 여러 신하들과 신대왕의 어전에서 회의를 열어 싸우는 것과 수비하는 것의 이해득실을 의논하였는데, 모두들 나가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림답부가 “우리는 군사 수가 적으나 지리가 험하다는 이점이 있고, 한은 군사 수가 많으나 군량 운반에 어려움이 있으니, 우리가 먼저 지킴으로써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후에 나가서 싸운다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고 하여, 먼저는 지키고 후에 싸우는 것으로 방책을 정하고, 각 주와 군에 명령을 내려 인민과 양식과 가축류를 거두어 성 안이나 산성으로 들여놓게 하여 굳게 지켰다. 

한의 군사들이 침입한 지 여러 달이 지났으나, 약탈을 하려고 해도 얻을 것이 없었고, 싸우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대응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군량이 다 떨어져 굶주리고 지쳐서 군사들이 퇴각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좌원까지 추격하니 한나라 병사는 하나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 


   고구려 제1차 전성기 지속

명림답부가 한의 침입군을 격파한 승세를 타고 강토를 개척하려 하면서, 먼저 선비의 이름난 왕 ‘단석괴’를 끌어들여 한나라의 유주, 병주(지금의 북경·산서)를 쳐서 소란하게 만들고, 그 뒤를 이어 고구려의 병력으로 한을 치려고 하였으나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113세였다. 신대왕이 직접 그의 빈소로 가서 통곡하고 왕을 장사지내는 예로써 장사지냈다. 

고구려 5대 모본왕의 1차 요동전쟁,  6대 태조대왕과 7대 차대왕의 2차 요동전쟁에 이어, 8대 신대왕과 명림답부의 ‘제3차 요동전쟁’에서의 승전은 조선의 옛 강토 ‘오열홀’인 요동에 대한 한나라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고,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내외에 과시한 쾌거였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