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구려의 제1차 전성시대- 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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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구려의 제1차 전성시대- 태조대왕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02.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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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태조대왕의 족보

고구려의 창건자는 고추모대왕이고, 그 아들은 유류왕(유리왕)이다. 그 다음이 3대 대주류왕(대무신왕)이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본기에서 대주류왕 이후 년대가 많이 삭감되었다.”고 주장한다. 4대 민중왕을 지나, 5대 모본왕은 대주류왕의 아들이 아니고 3세손일 것이라고 본다. 6대 태조대왕은 모본왕과 같은 항렬인 ‘재사(再思)’의 아들이니 대주류왕의 4세손이다.

모본왕은 한나라 외척 ‘왕망’이 민생 혁신의 기치를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망한 틈을 타서 요동을 회복하고,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으로 한나라와 대결하여 제압하고, 강대국 한나라로부터 해마다 2억 7천만 전을 고구려, 선비, 오환 3국이 공납 받는 조건으로 휴전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큰 성공으로 교만해진 모본왕이 내정에서 포학하므로 못 견딘 부하들이 모본왕을 시해한다.

이 때 종실에서 ‘궁’이란 이름의 7세 어린아이를 왕의 자리에 앉히니 바로 6대 ‘태조대왕’이다. 기원 53년 즉위하여 생모인 태후가 섭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기원 146년에 아들 차대왕(수성)에게 선위할 때는 100세로 94년 간 통치했다.


태조대왕 시대의 국가제도

고추모대왕이 고구려를 창건한 초기는 많은 소국들이 난립한 열국시대여서 국가제도가 미흡했다. 태조 때에 이르러 왕자 '수성'(차대왕)이 집정하여 왕검조선과 3부여의 것을 참작해 각종 제도를 제정하였다. ‘신, 말, 불’ 고조선 삼한(三韓)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3인 -신가, 팔치, 발치-을 두었다. 

대왕은 세습으로 부동의 지위이고, ‘신가’는 매 3년마다 대왕과 4부 ‘라살’(장관)과 기타 중요 관원들이 대회의를 열어 선임하였다. 3년이 되면 바꾸되 공적이 있는 자는 연임이 허용되었다.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가끔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왕자 ‘수성’은 ‘신가’로서 내외 병마를 장악하여, 이후 40년 간 그 권력과 지위가 태조대왕과 견줄만하였다.

기원 53년에 즉위한 태조대왕이 ‘선배’ 제도를 창설하여 고구려의 강성함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매년 3월과 10월 ‘신수두’ 제전에 모든 군중들을 모아놓고 칼춤, 활쏘기, 깨금질, 택견, 가무 연주, 대규모 사냥시합을 하여 여러 가지 내기에서 승리하는 자를 ‘선배’라 불렀다.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한나라

태조대왕 즉위 당시는 한(漢)의 부강함이 절정에 달하여 중국 유사 이래 최고라고 하겠다. 명장 ‘반초’가 서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지중해에 이르러 대진(이태리)과 교역했다. 또한 ‘두헌’이 5천여 리를 원정하여 외몽고의 북흉노를 대파하니, 밀려난 북흉노가 흑해 부근으로 들어가서 동고트족을 압박하여 북유럽으로 밀어냄으로써 서양 역사에서 ‘게르만 민족대이동’을 촉발했다.

한나라가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였으니 어찌 요동을 고구려 땅이라고 양보하고, 고구려와 선비에게 2억 7천만 전(錢)의 치욕적인 ‘세폐(歲幣)’를 해마다 바치겠는가? 두 나라의 전쟁은 처음에는 한이 요동을 침탈하고 고구려가 방어했으나, 다음 단계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한의 변경을 잠식하고 한은 방어하는 입장이 되었다. ‘요동 전쟁’은 기원 105년에 시작하여 121년에 끝났으니 모두 17년 간 지속되었다.


고구려와 한나라의 요동전쟁

전쟁 첫 해에 왕자 ‘수성’의 나이가 34세였다. 비록 고구려의 토지와 인구가 한나라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소수 병력으로 한의 대군을 방어하기에 넉넉했다. 한나라는 평원과 광야의 나라이므로 공격이 쉽고, 변경을 자주 교란하여 피폐하게 만든 후에 격멸시킨다는 것이 왕자 ‘수성’의 전략이었다.

 '선배'를 중심으로 한 정예병으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 후성 등 6개 현의 수비병을 격파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런 다음 예(濊)와 선비(鮮卑)를 끌어들여 해마다 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등지를 침략하자, 17년 동안 한나라의 인력과 가축, 재력의 소모는 비상하게 컸다.

기원 121년 정월, 한의 ‘안제’는 유주자사 풍환, 현토군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에게, 유주 소속의 병력을 중심으로 대고구려 결전을 명령했다. 이에 ‘수성’이 태조대왕의 명을 받아 ‘신치’총사령이 되어 2천 명의 정예 병력으로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풍환 등의 침공을 막고, 별동대 3천 명은 샛길로 나가서 요동, 현토의 각 군을 불태워 후방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드디어 풍환 등을 대파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왕자 '수성'이 다시 선비의 병력 8천 명으로 요동의 요대현을 쳤는데, 고구려 정예병을 신창에 잠입시켜 요동태수 채풍과 장수, 군관 1백여 명을 참살하고 요동군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백제와 ‘예’의 기병 1만을 동원하여 현토,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위만조선 ‘우거’가 한에 잃었던 옛 땅, 조선의 옛 오열홀(烏列忽)  전부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한나라는 패전을 인정하고 드디어 요동을 떼어주며 해마다 바치던 ‘세폐’를 다시 회복하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의를 애걸하고 포로로 잡혀있던 사람들을 속환해 갔는데, 포로 한 명당 어른은 비단 40필이었고 어린아이는 20필이었다.


태조대왕 재위 94년, 차대왕 재위 19년

왕자 수성이 요동을 회복하고 한의 세폐를 받게 되자 태조대왕은 그의 공을 포상하여 ‘신가’에 임명하여 군국대사를 총괄 책임지게 하였다. 왕자 ‘수성’이 40년 동안이나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적자가 아니고 서자였던 탓에 태자가 되지 못함을 불편해 하다가, 태조대왕이 100세가 되던 기원 146년에 수하를 규합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을 실력으로 주장하자, 태조대왕은 ‘수성’을 처형하자는 신하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수성에게 선위하고 별궁으로 물러나니 수성이 76세에 즉위하여 차대왕(次大王)이라 불렀다.

태조대왕 재위 94년 중에, 차대왕은 초강대국 한나라를 제압한 요동전쟁 개전이후 43년 간 군국대사를 총괄했고, 왕으로 즉위하여 19년을 다스리면서 동북아의 최강자로서 고구려의 제 1차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태조대왕 즉위년은 기원 53년이고, 태조대왕이 3월, 차대왕이 10월에 세상을 떠난 것이 기원 165년이니 부자 2대의 재위기간을 합산하면 113년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2016. 2. 18.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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