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올해의 유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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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올해의 유행어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4.12.0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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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언어는 세상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 중에서도 유행어는 지금을 잘 비추고 있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왕이면 유행어가 즐겁고 신나는 어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매년 유행어의 앞자리는 주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들이 차지했었다. 특히 개그콘서트에서 유행한 말이 올해의 유행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뤠~’나 ‘느낌 아니까’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행어가 허망한 것은 지금 이러한 유행어를 잘 안 쓰는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올해는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딱히 떠오르는 유행어가 없단다. 실제로 자주 쓰는 유행어도 없는 모양이다. 올해 코미디 프로그램이 전체적으로 부진했나 보다. 그런데 올해의 유행어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이 되었다. 아주 자주 사용되는 말도 아니고, 모두 알 만한 말들도 아니지만 대학생 사이에서는 씁쓸한 유행어로 자리 잡고 있는 말들이다. ‘열정페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인구론’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자소설’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이런 유행어의 내용을 알고 나면 착잡한 마음이 들 것이다.
 
‘열정페이’라는 말은 ‘열정이 있으니 적은 월급을 감수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 마디로 열정을 가진 젊은이라면 적은 월급에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인턴’이니 ‘계약직’ 등의 이름을 붙여 자연스럽게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올 한 해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우울했다면 ‘열정페이’가 한 몫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구론’라는 말은 아주 유행한 말은 아닌 듯싶다. 하지만 씁쓸함의 정도는 약하지가 않다. 이것은 ‘인문계 졸업생의 90%는 논다.’라는 말의 약어라고 한다. 이공계 기피현상과 함께 인문계 기피현상도 깊어지는 듯하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인문계의 취업이 어렵다면 위기는 당연히 깊어질 것이다. 인문학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힘인데, 점점 사그라지는 듯하여 아쉽다.
 
‘자소설’이라는 말은 ‘자소서’에서 유래하였다. ‘자소서’는 ‘자기소개서’의 약어이다. 나는 처음 학교에서 학생이 ‘자소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자술서’를 써야하나 오해했었다. 취업에서 늘 자기소개서가 중요하다. 자기소개서 쓰기에는 ‘스펙’을 갖춰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한 몫 한다. 어학연수를 다녀와야 하고, 한두 언어 정도는 능숙하게 해야 하며, 토익이나 토플 점수는 만점에 가깝게 받아 놓아야 한다. 물론 인턴 경험도 중요한 스펙이 된다. 그러니 ‘열정페이’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자소서’가 이제 ‘자소설’로 변하였다. 모든 지원자가 스펙을 갖고 있으니 채용자의 눈에 띄게 하려면 자기소개를 마치 소설 쓰듯이 꾸며내는 능력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자신의 능력과 인성을 부풀려 서술하는 글이 자소설이다. 실제는 그러하지 않으니 금방 탄로 날 거짓글쓰기이다. 이제 자기소개서마저 불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 때 왕따가 올해의 유행어가 된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저런 유행어는 빨리 없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왕따는 이제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장하는 어엿한 신어가 되었다. 슬픈 일이다. 언어는 세상을 반영한다. 나쁜 말이 많아질수록 나쁜 표현을 많이 사용할수록 세상은 어두워진다. 반면 긍정의 표현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밝아진다. ‘열정페이’, ‘인구론’, ‘자소설’ 등의 어휘들은 신어로 남지 말고 사라져 가길 바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먼 훗날에 ‘그때 그런 말이 있었지.’하고 웃으며 말할 날이 있기 바란다. 아니면 아예 기억 속에서 잊혀 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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