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칭찬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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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칭찬의 어려움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4.07.0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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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칭찬’은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잘 한 것을 보고 좋다고 해 주는 말이다. 주로 선생님이 학생을, 부모가 자식을,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칭찬한다. 칭찬은 누구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칭찬에는 평가가 담겨 있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칭찬한다는 말은 왠지 어색하다. 평가는 주로 위에서 아래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쓰는 말이 ‘찬양, 찬미, 찬탄, 칭송’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모두 칭찬보다는 아부처럼 들린다. 아니면 아예 아주 높고 고귀한 존재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스토니부룩 대학 박성배 교수님의 ‘미국에서 강의한 화엄경 보현행원품’이라는 책을 보다가 ‘칭찬여래원(稱讚如來願)’ 부분에서 눈이 멈췄다. 뜻이 ‘여래’를 칭찬하고 싶다는 것인데, 여래를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한다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경전의 내용보다 어휘 표현에 마음이 가는 것을 보니 직업병은 직업병인가 보다. 아무튼 ‘칭찬’이라는 단어가 원래 아랫사람에게만 쓰는 표현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칭찬’을 여래께 썼다는 것을 알고 나서 여래를 어떻게 칭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떤 종교에서든지 절대자나 신앙의 대상을 칭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말이 ‘칭찬’을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야 찬송이 되고, 찬양이 되고, 찬미가 되고, 찬탄이 될까?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고, 그냥 ‘찬양합니다. 찬미합니다.’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찬양과 찬미는 늘 부족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찬양을 하는 것일까?" 어차피 부족한 말솜씨인데 찬미를 하는 게 뭔 소용일까? 그런데 그 대목에서 박성배 선생님은 탁월한 답을 하고 계셨다. 그것은 찬양의 순간이 부끄러움과 반성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 찬미할 수 없는 이를 닮으려 노력하는 것이 칭찬과 찬미의 까닭이 된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갚을 길도 닮을 길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 순간에 찬양이 절로 나오게 된다. 찬양은 시켜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듣는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듣는 사람이 그리 훌륭하지 않은데 칭찬을 하면 아부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칭찬을 포기하기도 한다. 불쾌감과 아부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칭찬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상대방이 듣기 좋게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대방의 좋은 점을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서 나를 반성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칭찬할 게 없다는 말도 한다. 저 사람은 아무리 살펴봐도 나쁜 점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교만이 아닐까?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러한 존재의 이유에는 좋은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칭찬은 상대의 좋은 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좋은 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고, 칭찬할 말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칭찬은 아름답다.

칭찬은 참 어렵다. 단순히 칭찬 받을 만한 사람만 칭찬한다면 좀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는 칭찬 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참다운 칭찬은 참다운 반성과 맞닿아 있다. 위대한 이에 대한 칭찬이건 하찮아 보이는 이에 대한 칭찬이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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