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체념과 깨달음의 세계
상태바
[우리말로 깨닫다] 체념과 깨달음의 세계
  • 조현용 교수
  • 승인 2022.09.20 11: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길을 걷다보면 갈림길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길을 택하면 다른 길을 포기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인생에서는 그런 장면이 많습니다. 둘 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경우에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운 순간입니다. 이 때 들려오는 단어가 체념입니다. 삶이라는 길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체념을 합니다.   

체념(諦念)이란 말을 들으면 포기(抛棄)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전에 저에게 체념과 포기라는 말의 의미 차이를 물으셨던 분이 생각납니다. 사실 체념과 포기를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념이 곧 포기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체념과 포기는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포기(抛棄)의 한자를 보면 던질 포에 버릴 기입니다.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이겠으나 권투 시합에서 게임을 포기할 때 코치가 수건을 던지기도 합니다. 던져 버리는 것이 포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다 던져버리고 싶다는 말이 무섭게 들립니다.

일본어에서도 포기한다는 의미의 단어에 체(諦)를 씁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일본어에서도 포기와 체념이 잘 구분되지 않는 듯싶습니다. 주변에 수학 공부가 어려워서 포기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런 학생을 수포자라고 합니다. 수학을 포기한 자라는 말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정말 모르겠으면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바로 포기의 충동입니다. 마라톤을 할 때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주저앉아 일어나기 싫은 마음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참 많습니다. 사는 게 포기의 연속이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저는 포기라는 말과 체념이라는 말을 들으면 소유의 느낌이 납니다. 포기라는 말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느낌인 반면, 체념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왠지 포기라는 말에는 아쉬움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체념에는 그 정도의 느낌은 아닙니다. 체념에서는 오히려 달관의 경지마저 느껴집니다.

사실 체(諦)라는 말은 포기와 관련이 되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체는 깨달음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한자 체(諦)의 의미를 찾아보면 ‘살피다, 조사하다, 자세히 알다, 소리 내어 울다, 진실, 깨닫다’의 의미입니다. 이 중에서 ‘진실’과 ‘깨닫다’는 의미는 불교의 의미라고 합니다. 즉, 체념이라는 말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살피는 생각이고, 깨달음의 생각인 셈입니다.

세상을 살면서는 체념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것이라고 딱히 이야기하기에는 곤란한 것이 많기 때문에 손에서 놓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착(執着)은 체념의 반대말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싶어 하고, 손을 놓지 못하는 수많은 것을 살피고, 조사해서 자세히 알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진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본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념은 깨달음입니다. 나를 자라게 합니다.

저는 체념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동안은 포기하고 말았던 수많은 일들이 왠지 깨달음을 위한 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의 포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강박관념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내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모든 것을 다 이루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심한 고통이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할 겁니다.

살면서 우리에게는 종종 체념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집착의 마음을 옅게 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알게 되는 일, 이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일은 소중한 깨달음일 겁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습니다. 마음이 편하네요. 엷은 미소를 짓게 됩니다.


관련기사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