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죽음과 조상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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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죽음과 조상에 대한 생각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5.06.2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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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외국인 학생이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죽겠다는 표현을 왜 이렇게 많이 하냐고. 죽음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고. 하긴 우리는 배고파 죽겠고, 추워 죽겠고, 서러워 죽겠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심심해서 죽겠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배고픔이나 추위나 서러움이나 심심함(?)은 죽음만큼 두렵고 견딜 수 없는 일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경우에도 쓴다. 보고 싶어 죽겠고, 예뻐 죽겠다고 한다. 이럴 때 왜 죽나? 단순한 강조일까? 정말 죽음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까?
 
  우리말 ‘죽다’의 표현을 보면 그 쓰임이 찬란하다. 성질을 죽이기도 하고 풀이 죽기도 한다. 배추 같은 식물도 숨이 죽고, 장기나 바둑에서도 말이 죽고, 심지어 화투를 칠 때도 여기저기서 죽는다. ‘그만 죽으세요.’라는 끔찍한 표현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미용실에 가면 머리도 죽여 달라고 하니 표현의 한계가 어디일까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런 표현을 보면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는 하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무감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힘들다는 이야기를 달고 사는 사람에게는 ‘죽겠다죽겠다 한다.’라는 표현을 쓰고, 힘든 일이 연이어 닥쳐 올 때는 ‘죽어라죽어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듯하다. ‘정말 죽겠다.’라는 표현에서 죽음이 진짜는 아니라는 생각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죽음에 관심이 많은 민족인가? 아니면 죽음이 두려운 민족인가?
 
  나는 역으로 죽음과 관련된 말들은 우리가 저승보다 현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생긴 표현으로 본다. 이승과 저승이라는 말에서 ‘승’은 ‘생(生)’에서 온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여기가 ‘이 생’ 곧 ‘이승’이고, 내가 갈 곳이 ‘저 생’ 곧 ‘저승’이다. 우리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내세보다는 지극히 현세적임을 보여주는 속담이다. 우리는 내세에 대한 큰 관심은 없다
 
  우리는 내세보다는 오히려 조상에 대한 관심이 크다. 죽음이 끝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죽어서 어디로 가게 되는지는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혼령이 되어 후손을 돌보는 일을 하는 조상에 관심이 많다. 천국이나 천당, 낙원, 극락이라는 말보다는 그저 ‘좋은 곳’에 가시기를 원한다. 좋은 곳이 어딘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을 하지 않는다.
 
  조상이 좋은 곳에 가시기를 빌고, 그런 조상을 잘 모시는 후손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면 조상님이 은덕을 베푸신다. 우리가 잘 되면 다 조상 덕이다. 조상님의 보살핌 덕분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조상 탓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강하다. 잘 되면 조상 덕분이고, 안 되면 나의 모자람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속담이 보여주는 우리의 참 모습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조상은 바로 부모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후손은 자식이다. 그래서 효가 중요하고, 내리사랑이 중요하다. 조상을 잘 모신다는 말은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거다. 돌아가신 후에 애달파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말을 한다. 부모께 잘 못하면서 조상님께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살아계실 제 섬기기 다하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우리는 죽음보다는 조상, 조상보다는 부모에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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