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전생(前生)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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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전생(前生)이 필요한 이유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5.12.3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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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또는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나에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길까?’ 우리는 이런 말들을 자주 한다. 전생은 이렇게 늘 나의 합리화처럼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가득한 세상에서 내게 닥친 불행이나 행운을 설명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전생을 끄집어낸다. 내가 지금 벌을 받는 것도 복을 받는 것도 전생에 내가 행한 일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으로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해결책을 얻는다.

 전생이 있다는 것은 사실일까?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있다면 어떻게 존재할까? 지금 내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면 동물의 모습이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도움이 안 된다. 점점 생각을 미궁으로 이끈다. 답이 안 나온다. 나는 이런 질문보다는 왜 전생이 필요할까에 대해 물어야 한다고 본다. 전생이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전생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중요하다.

 생각하기도 싫은 고통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참 억울하고 답답하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에게 괴로움이 닥쳤을 때 뭐라고 위로해 줄 말도 없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괴롭히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정말 힘들다.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안 된다. 하늘이 원망스럽다. 괜히 이 세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목숨을 버리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러면 안 된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이유를 모르겠는 고통에 전생은 원인이 되어 준다. 전생은 이런 위험한 마음에 답을 준다. 내가 전생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남을 괴롭힌 일이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원인을 이전 생애에서 찾을 수밖에.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사람은 내가 전생에서 혹독하게 괴롭혔던 사람일 수 있다. 나의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 전생을 생각한다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충심으로 더 잘해야 한다. 내가 더 못되게 굴었던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아름다워질 수 있다. 전생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전생은 내게 닥친 복에도 답을 준다. 이런 행복이 전생의 덕이라면 이 생애(生涯)에도 잘 살아야 한다. 지금의 복이 기억나지 않는 전생에 내가 행한 수많은 선업(善業) 덕분이라면 다음 생을 위해서도 선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질수록 베풀고, 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만을 위해 살고 남을 괴롭히면서 기뻐하면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다. 전생에 받은 복이 현세를 즐겁게 하였으나 현세에 지은 악덕이 다음 생에 참혹한 결과로 다가올 수 있다. 현세에 복 받은 사람이 꼭 부러운 것만은 아니다. 선하게 살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원인에는 그에 합당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정말 전생이 있냐고 묻지 말자. 전생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전생이 없다면 평생 억울함에 가슴을 칠지도 모른다. 전생이 없다면 세상에 불 지르고 복수할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수많은 ‘확!’이 실행될지 모른다.

 나는 그래서 전생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다. 내게 닥친 괴로움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다음에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괴로움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 도우며 살아야겠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겠다.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