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내세(來世)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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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내세(來世)가 필요한 이유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5.12.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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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사실 많은 사람이 전생(前生)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미 지나온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내세에는 관심이 많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는 생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리라. 나는 내세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곳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자체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의 사고와 ‘왜’의 사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의 사고는 과학적, 기술적 사고이고, ‘왜’의 사고는 철학적, 종교적 사유이다. 내세를 놓고 ‘어떻게’라는 사고를 하면 답은 알 수 없다가 된다. 어떻게 내세가 존재할 수 있는가? 내세는 어떤 모습인가? 여기에 명확히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왜 내세가 필요할까에 대한 질문은 해 볼 수 있다. 왜 내세가 있을까? 아니 왜 있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탁월한 답은 소크라테스가 했다. ‘파이돈’을 보면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에게 제자들이 묻는다. 내세가 있냐고. 소크라테스의 답은 간단했다. 내세가 없다면 누가 좋을까? 내세가 없다면 아마 악인들이 좋을 것이다. 이승에서 아무리 패악질을 하여도 죽어서 그것으로 그만이라면 답답한 일이다.

 죄에 대해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죄인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생을 끝내면 안 되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악인에게 유리하게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나도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읽고 내세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세는 반드시 필요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내세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세가 있는 게 과연 좋을까?’로 질문이 옮겨가야 한다. 나는 내세가 있으면 좋겠다. 이승에서의 인연이 이렇게 끝나는 게 너무 아쉽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으로 영원히 이별하는 장면에서 내세에 대한 많은 바람을 이야기한다. 좋은 데로 가기 바란다든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든지 하는 말에서 내세의 모습을 그린다.

 내가 볼 때 내세는 만남의 장소이다. 그리움이 마침내 기쁨이 되는 곳이다. 평생 고생만 한 사람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떴을 때 이렇게 끝이 난다면 너무 안타깝다. 내세가 있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미처 못 하였는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내세가 꼭 있어서, 그래서 다음 생에서는 부디 편했으면 하고, 행복했으면 하고, 기뻤으면 하는 것이다.

  이승에서 인연을 충분히 나누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 생에서 인연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먼저 가서 기다리시오. 곧 따라가리라. 아이들 다 키우고, 시집 장가보낸 후 나도 기쁘게 따라 가리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헤어짐은 슬픔 그 자체이다. 이산가족의 애절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평생 그리움으로 지새웠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사람들은 저 세상이 있음에 고마워한다. 다음 세상에서는 절대로 헤어지지 말고 꼭 함께 살자는 말이 저리게 아프다. 이산가족에게 저 세상마저 없다면 어떡하겠는가?

  글을 마무리 짓기가 무척 아프다. 누구를 내세에 만나고 싶은가? 부모님, 아내, 남편, 아이들, 친구들...... 내세에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헤어질 일이 먼저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이승에서 헤어져야만 저승에서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확실하지 않은 내세에 기대지 말고 우선 살아있는 현실에서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아야 하겠다. 이승의 삶에서도 서로에게 기쁨이 되기 바란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부터 나머지 시간도 모두 우리에겐 내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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