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이름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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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이름 짓기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5.08.1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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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 교수, 국제교육원 원장)
  이름도 문화다. 이름 짓는 수준이 문화의 수준을 나타내기도 한다. 남대문(南大門)과 숭례문(崇禮門)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어린 시절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남대문이라고 불렀다. 그저 남쪽에 있는 큰 문이라고 부른 셈이다. 참 재미없는 이름이 아닌가? 그런데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남대문은 원래 숭례문이었음을, 그리고 그 의미는 ‘예의를 숭상한다.’는 높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름의 뜻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가슴 벅차다. 제대로 이름이 불리지도 못하던 운명의 ‘숭례문’이 불타던 광경이 아프게 기억난다.
 
  우리나라에는 궁궐이나 정자나 가옥에도 다양하게 이름이 지어져 있다. 이름은 부르기 위해서도 사용되지만 장소의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그 장소에 가면 늘 옷깃을 여미게 된다. 숭례문에서 ‘례(禮)’는 방향으로는 남쪽을 나타낸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각각 방위를 나타내는데 그 중에 ‘예’가 남쪽을 의미한다. ‘인’은 동쪽으로 나타낸다. 그래서 동대문의 원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의’는 서쪽을, ‘지’는 북쪽을 나타낸다. ‘신’은 가운데를 의미한다. 그래서 ‘보신각(普信閣)’이 가운데 있다. 서쪽과 북쪽에는 무슨 문이 있을까? 어떤 장소에 가든지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알아차리지 못한 세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화장실을 예전에는 변소라고 했다. 화장실과 변소의 느낌은 천지 차이다. 지금 누가 변소나 뒷간에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얼굴부터 찌푸린다. 이름은 이렇듯 꺼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절에 가 보면 화장실이라는 말 대신에 ‘해우소(解憂所)’라고 쓰인 것을 보게 된다. 걱정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서양식으로 하자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곳이라고나 할까? 카타르시스라는 말도 원래 ‘배설’의 의미와 관계가 있다. 절에서 화장실에 가면 우리 몸속의 걱정이 빠져 나가나 보다. 그렇게 걱정이 빠져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름이 보여주는 발상이 재미있고 반갑다.
 
  사람의 이름은 어떤가? 우리 이름은 한자의 영향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몇몇 이름을 제외하고는 순 우리말인 경우는 없다. 우리말이건 한자어건 간에 이름에는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어떻게 자라면 좋을지에 대한 부모의 바람이 새겨져 있다. 종종은 귀신의 샘냄을 두려워하여 하찮게 짓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단지 발음만 편하게 하려고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양식 이름을 흉내 낸 이름에는 소리만 있지 내용은 없는 느낌이다. 아이의 이름에 깊은 바람을 담았으면 한다.
 
  지명(地名)에도 우리의 역사와 사고가 담겨 있다. 땅 이름만 봐도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양이나 유래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는 사람도 적고 안다고 하여도 한참을 설명해야만 한다. 간단하게 서울의 지명을 생각해 보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지명부터 관심을 가져 볼 일이다. 내가 있는 경희대학교 주변의 지명을 보면 ‘회기동, 이문동, 청량리, 석계’ 등이 보인다. 이런 이름은 왜 지어졌을까? 우리 집 주소에는 ‘천장산(天藏山)’이 들어간다. 왜 천장산이라고 했을까? 천장산은 ‘하늘이 감춘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의릉’은 누구의 능일까? 장희빈의 아들 조선 경종의 능이다. 이렇게 이름의 기원을 찾아보면 공부가 많이 된다.
 
  이름은 문화다. 이름은 우리의 역사이고 사고다. 또한 앞으로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름 짓기에 더 공을 들이고, 이름을 해석하는 일에 배우는 즐거움이 있기 바란다. 다산초당처럼 나도 집에 이름을 붙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