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작품 보여주는게 더 큰 감동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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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작품 보여주는게 더 큰 감동이었죠”
  • 이석호 기자
  • 승인 2010.03.2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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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0년만에 고국서 개인전 연 재미화가 원미랑씨

원미랑 씨
“아버지 별명은 왕뽀이 였어요. 학생들의 왕이란 의미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죠. 어쨌든 제가 하는 미술에 대한 관심은 최고셨죠.”

재미화가 원미랑씨(62)를 찾은 것은 지난 14일. 높이 7자 넓이 4자의 설치작품을 매달은 화실 창밖으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전시회명은 <햇빛을 잡아라: capturing sunlight>. 우연히도 전시회장은 이름에 ‘태양’이 붙은 서울 소격동 SUN 컨템포러리 갤러리였다.

이곳에서 원 작가는 1층과 2층에 걸린 설치작품과 회화작품을 설명하며 ‘왕뽀이’ 원흥균 교장의 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경기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는 제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전부였죠. 꼬마때 집안을 온통 낙서로 도배해도 웃기만 했던 분이었어요. 몇 년 전 돌아가신 후 수집한 작품을 세어보니 500여개나 됐어요. 아직도 계절마다 집안에 걸린 수십 점의 작품을 바꿔 걸던 아버지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런 아버지의 헌신 덕분이었을까. 미술가로서의 원 작가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경기여고를 나온 그는 서울대 회화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총장상을 타고, 1970년 프랑스 정부 국비 장학생으로 가 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파리 제1대학 소르본느에서 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작품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와 프랑스 문화성에서 장학금을 탔다. 1975년에는 귀국해 서울대와 성신여대에서 강의를 맡는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이듬해에 지금은 벤처사업을 하고 있는 남편과 미국으로 이주해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는다.

“미술은 바이러스인가 봐요. 한국에서 강의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원 작가는 미국에서 로스엔젤레스 ‘블루’, 샌프란시스코 ‘여성적 비젼작가들’, LA 아트페어 등에 참가하는 등 1년에 2번정도 작품전에 계속 출품을 했다. 그가 지금까지 참가한 전시회는 총 20여번에 달할 정도.

한국에서도 2008년 성곡미술관에서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전을, 그리고 지난해 한국이민사 박물관 초대전인 ‘디아스포라의 귀향’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번에 30여년 만에 한국에서 자신만의 개인전을 열게 된 것.

“제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빛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원 작가는 이번 작품을 위해 붓 대신 불을 잡았다. 금속 망으로 된 얇은 스크린을 서예가가 큰 붓에 먹을 묻혀 화선지에 써내려가듯 철판을 달구었고 꽃 모양으로 수놓은 14개의 작품들을 천정에서 쭉 내려뜨렸다.

“미국에서 수십번 작품전을 한 경험이 있지만 많이 떨렸어요. 오래 된 동창들과 가족들에게 저만의 작품전을 보여준다는 것이 더 큰 감동이었어요.”

내년 미국 트라이튼 아트 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인 원작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더 많은 작품전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는 이번 달 말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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