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랍이 개혁으로 가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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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랍이 개혁으로 가는 길목에서
  •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
  • 승인 2024.02.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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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아랍의 명암

금번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카타르가 요르단에 이겼는데, 요르단 국민들은 “가자 가자 요르단!(일르압 야 우르둔)”을 목청껏 외쳤다고 한다. 알자지라 넷에 기고한 무함마드 카띠르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카타르가 승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20년 동안 카타르는 많은 분야에서 실질적인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었고, 나는 이것이 재정적 풍요로움의 결과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타르는 일부 이슬람 정권처럼 공허한 슬로건과 거짓 약속을 남발한 것이 아니라, 시민을 돌보고, 사회 정의를 추구하고, 경제를 개발하고, 투자를 다양화하고, 환경을 보존함으로써 달성됐다”

그러나 위 내용을 보면 다소 과장된 표현들이 보이고 카타르의 어두운 면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카타르는 엄연히 정치적 이슬람을 지향하는 ’이슬람주의‘ 국가이고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와 외교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갖기도 했다. 우리가 아랍의 명암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그들의 역사를 되짚어봐야 한다.

21세기 아랍의 개혁을 위한 시도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이쓸라흐’는 영어로 ‘reform(개혁)’이라고 번역하지만 이쓸라흐의 본래 의미는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함(개선)’이란 뜻이다.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아랍 지식인들은 개혁 사상에 몰두했다. 그 당시 아랍 국가의 개혁적 변화를 지향하는 두 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아랍 이슬람 사상가와 학자들이 만나서 세계는 엄청나게 빠르게 변화하는데, 아랍 국가 내에서 변화가 일어날 경우 왜 그 속도가 느린가에 대한 논의였다.
 
두 번째는 ‘아랍 개혁 이니셔티브(Arab Reform Initiative)’였는데, 변화를 가져오는데 필요한 사고로 전환하고자 이에 대한 연구를 정치 및 전략 연구소에 일임했다.

이 두 가지 시도는 세계에 널리 알려진 ‘아랍인 예외(알이스티스나 알아라비)’에 대한 아랍 세계의 직접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시도는 서구식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변화와 개혁’은 아래로부터 시작돼 정당이 형성되고 선거 메커니즘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랍 국가는 여전히 왕이나 대통령 중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거부한 중동 지역에 미군이 들어오게 됐고 그로 인해 2001년 9·11 사건이 터졌다. 앞서 언급한 두 번의 시도, 그리고 이와 유사한 시도들에 참여한 아랍인들은 지역의 상황을 고려한 개혁을 위해 아랍적인 콘텐츠를 찾고 있었다. 

아랍 예외주의?

이 같은 노력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1세기 두 번째 10년이 되어서,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칼럼니스트 무함마드 카띠르는 아랍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들을 보면서, 2011년 3월 ‘아랍 예외주의의 종말’이란 말로써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고자 했다. 아랍 예외주의는 아랍인과 비아랍인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해왔던 것인데, 아랍 세계에는 다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이성과 예외, 자연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랍 국가는 세계의 ‘민주주의 혁명’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아랍혁명이 시작되자 아랍인과 세계인의 판단은 성급했고, 혁명은 빠르게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나세르주의, 마르크스주의, 자유주의 세력 등과 같이 아랍 좌파의 다양한 파벌에서 비롯됐다. 이 사람들은 종파주의와 내전으로 이어진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결부됐고 대규모 혼돈을 가져왔다. 

다른 한쪽은 종교 운동(타이야르 디니)의 출현이었는데, 이 운동은 무슬림형제단 운동과 거기서 발아된 추종자들, 그리고 이 형제단을 능가하는 사람들이 잔나(파라다이스)에 들어가고자 서로 경쟁하는 테러조직을 낳았다.

아랍의 봄 이후 10년은 아랍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 아랍인들이 혼돈과 종교적 급진주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 것은 정의로운 선택이 아니었다. 

아랍의 봄 2차 물결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아랍의 봄 1차 물결이 지나고, 알제리와 수단에서 시민의 봉기가 일어났다. 2019년 4월 2일 알제리의 대통령 압둘 아지즈 부타플리카(20년 통치)가 하야했고, 4월 11일에는 수단 대통령 우마르 알바시르(30년 통치)가 군부 쿠데타로 자택 연금됐다. 
 
이처럼 1차 물결 이후 10년도 못돼 수단, 이라크, 레바논, 알제리에서 아랍의 봄이라는 또 다른 물결이 일어났다. 그런데 아랍의 봄이 1차 물결이건, 2차 물결이건, 아니면 그 둘이 혼합된 물결이건 간에 그 어느 시기에도 아랍의 상황은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랍 혁명이 시작된 이후 10년 동안 그 중반부터 끝까지 아랍의 봄에 대한 아랍인의 경험은 아주 비극적이었고, 아랍의 봄 실패와 정권 교체가 있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외국 군대가 개입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아랍 국가에는 개혁의 물결(타이야르 이쓸라히)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 물결은 세상을 진보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비참한 상황에서 아랍의 생활 수준을 높여가고, 국가를 가장 높은 진보의 수준에 올려놓고자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에미레이트 등 ‘아랍의 봄’에서 구조된 나라에서는 집중적인 개발과 지속적인 건설이 이어졌으나, 요르단과 이집트의 경제는 아랍 혁명 이전보다 더 나아지지 못했다. 

아직도 미완성의 아랍의 봄을 바라보면서 칼럼니스트 마샤리 알다이디는 아랍의 봄 시기에 일어난 일은 이미 끝나버린 단계가 아니라 아직도 지속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반복되는 문화’가 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