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펠로시의 한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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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펠로시의 한국 방문
  • 이병우 중국시장경제연구소장
  • 승인 2022.08.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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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코트라 수출전문위원
이병우 중국시장경제연구소장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고 이틀 뒤에 한국에도 들렀다 갔다. 예상대로 중국은 험한 말과 위협적인 행동으로 대만을 괴롭히는 중이고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펠로시에 대한 의전이 엉망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원래 잘해도 탈이고 못해도 탈인 것이 작금의 우리 정가의 모습이다. 언론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국제정치의 기본적인 개념을 조금이라도 알고 이런 글을 쓰는지는 모르겠다. 우리의 펠로시를 향한 의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나름의 깊이 있는 사고와 이해를 바탕으로 판단한 후에 비판의 글을 썼었더라면 좀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근래의 동아시아의 정세와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미묘하고 어지러운 형국이다. 우리의 펠로시 의전은 그런 종합적인 배경과 상황을 고려한 우리 정부의 고뇌에 찬 결론이라고 본다. 중국과 미국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금은 서두는 듯한 미국의 중국 견제는 양측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일말의 여유를 허락하고 있지 않다. 약자는 눈치를 보게 마련이지만 국제사회에 존재하는 외교 전선에서는 눈치가 아니라 압력과 굴욕 또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외교는 인류평화라는 공통적인 명분도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런 훌륭한(?) 명분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다. 오로지 자국의 철저한 이익 중심으로 국제외교는 변화하는 중이다.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회귀 정책도 그 일환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중국의 부상’이 제일 큰 근원일 듯싶다. 예상치 못한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이 도처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중국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서방이 지시하고 가르치는 ‘서방 우월적 시스템과 사고’에 동조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길을 고집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못마땅한 것이다. 공부도 못하고 가난했던 놈이 어느 날 성적이 좋아지고 아버지 형편이 좋아지는 배경을 등에 업고 큰소리를 친다고 본다면 심한 과장일까?

우리는 단순히 중국의 예민한 반응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저토록 중국은 대만 문제에 민감한지를 알아야 한다. 두 놈이 학교에서 싸워서 선생님에게 끌려오면 그 선생님은 우선 차분하게 두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공부 잘하고 잘 사는 학생의 말만 듣고 일방적으로 상대 학생을 야단치면 그 학생의 기분은 어떨까? 우리가 중국에 비즈니스를 하러 가서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가 몇 개 있다. 그중에 하나가 공산당 비판과 대만 이야기다. 접대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사업은 끝이 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종종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일까? ‘몰라서’ 그런 거다. 중국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는 의미다. 잘 모르면 아는 척이라도 말아야 하는데 괜히 ‘아는 척’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최소한 대(對) 중국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중국의 굴욕의 100년’을 알아야 한다. 인터넷이나 서방의 학자들이 쓴 중국 비판의 글만 대충 읽고 편향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중국 사업은 하지 말아야 하며 중국 외교도 접고 중국과 단절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우리에게 쉬운 일인가? 펠로시가 대만을 방문할 때 미국의 항공모함이 특수 작전에 들어가고 수백억짜리 전투기가 펠로시를 태운 비행기를 에워싸면서 호위했다. 국제외교에서 할 말 다하고 속된 말로 ‘꼬장’을 부리려면 이 정도 파워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없다. 그래서 ‘중국의 100년 굴욕’도 알아야 하고 ‘미국의 중국 견제’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쌍방향의 관점에서 아주 냉철하게 우리의 입장과 처신을 표명해야 한다.

정권은 바뀌어도 우리의 외교관들은 음지와 양지에서 불철주야 살얼음판을 걷는 중이다. 특별히 미국과 중국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연속이다. 상황과 때에 따라서 한 쪽 편을 들어야만 하는 처지가 얼마나 곤혹스러운지는 잘 알 것이다. 노모(老母)의 편을 들자니 그렇고, 아내의 편을 들자니 그렇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심정을 남자들은 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한다. 중국 말에 “체면을 잃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중국은 굴욕의 100년 동안 심장까지 도려내는 체면의 상실을 맛보았다. 우리도 명성황후가 살해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산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 몇 푼으로 때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체면’을 되찾자는 것이고 미국은 중국이 더 커지면 자기들이 누려왔던 세계 최강의 지위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 당연히 자국의 이익과 체면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한국과 북한을 위해서 다투고, 펠로시가 위험을 무릅쓰고 대만을 그냥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입장은 그야말로 그 중간에 서 있는 형국이다. 진중하고 명민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야밤에 미국 하원의장이 떴다고 소동을 부리면서 거창한 의전을 한다고 당장의 우리의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일이다. 때로는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의 입장도 고려하는 것이 외교의 전략이고 전술이다. 전격적인 사드 배치 같은 ‘모자란’ 외교는 반드시 참상을 불러오는 법이다. 사드 배치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는 펠로시의 의전보다 더 커다란 딜레마가 수도 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애국과 국익이 비슷한 듯해도 결정의 순간에는 여러 변수가 있는 법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단지 애국이라는 차원에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는 8월 24일이면 한중수교 30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30년의 세월 속에 온갖 부침과 애환의 사연을 간직하고 한국과 중국은 여기까지 왔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아직도 우리의 대(對) 중국 공부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했다. 백번을 싸워서 백번을 다 이긴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천하의 제갈공명이라고 해도 백 번을 다 이길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 이기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전략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애국이고 국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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