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동이의 강역과 서북방 국경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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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동이의 강역과 서북방 국경의 변천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8.04.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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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역사에서 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전진하고 물러서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 이형모 발행인

고조선과 중원의 경계는 북경 남쪽 ‘바오딩’

 

유구한 조선의 역사에서, 강역 문제의 처음은 고조선과 중국 중원의 경계선을 밝히는 문제이고, 끝부분은 조선 후기의 ‘간도 영유권’이다. 역사학자 심백강은 중국의 많은 사서를 근거로 고조선과 중원의 경계선을 북경 남쪽 170km 지점에 있는 ‘보정市(바오딩)’라고 설명한다. 보정市는 진시황의 통일 직전에 연나라 장성의 동쪽 끝이고, ‘낙랑군 수성현’이 위치했던 지역이며, 갈석산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긴 역사에서 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전진하고 물러서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단군세기에는 BC2333년부터 BC194년까지 무려 2천여 년간의 생생한 역사 속에 우리의 강역으로 언급된 중국의 지명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13세 흘달단군(BC1782년)께서 차지했던 빈(邠)과 기(岐)는 중국의 은나라와 연합하여 하나라를 정벌하여 얻은 지역으로써 현재 섬서성 위수와 경수의 지역이고, 또 21세 소태단군 때 고등이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킨 지역은 지금의 하북성 위쪽 지역이다.

산동, 강소, 안휘, 절강지역에 사는 ‘동이’

23세 아홀단군(BC1237년) 때 은나라 지역 깊숙이 침공하여 포고씨를 엄(淹)나라에 영고씨를 서(徐)나라에, 방고씨를 회(淮)나라에 임명했다는 회대의 땅은 지금의 산동성부터 밑으로 강소성, 안휘성 및 절강성에 이르는 중국대륙의 동쪽지역이니 동이(東夷)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동이는 치우천왕(BC2707년)의 탁록 정벌 이후 중국대륙에 진출했던 구려(九黎) 중 동쪽에 위치했던 조선국의 방계제국을 말하는 것으로써 중국의 화하족은 그들을 구이(九夷)라고도 불렀다.

연나라와의 80년 전쟁이후 북경 북쪽으로 경계 이동

단군세기에 45세 여루단군 때인 BC343년 전국7웅의 하나인 연나라와의 긴 전쟁으로 대부여의 국경이 연나라와 대치한 북경지역의 북쪽으로 물러나고 있다.

반고가 지은 <후한서>의 동이열전 이후 동이에 대한 인식은 부여, 읍루, 고구려 등 동북방에 한계를 두기 시작했으며 신라와 백제도 포함되었는데, 모두 춘추시기 이전의 동이의 강역과 역사를 축소하기 위한 대국적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현재에도 자신들 한족을 화하(華夏)민족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국가인 하(夏)나라의 뒤를 이었다는 뜻인데 하(夏)나라는 하남성 서부와 산서성 서부를 중심으로 통치하였으며, 현재 하남성의 등봉인 양성(阳城)을 도읍으로 하였다. 곧 화하족은 황하강 유역의 민족이며 <사기> <한서> 등에서 사용된 중국이라는 말도 바로 그들의 주 활동무대인 중원을 가리키는 말로써 산서, 하남, 산동, 하북의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 중국의 영토 변천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기원 53년) 이래로 7백년 동안 중국 한나라(3차례), 수나라(2차례), 당나라(2차례) 모두 7차례 큰 전쟁을 치른다. 고구려가 1차, 2차, 4차, 5차, 6차전에서 5번 이기고, 중국이 3차, 7차전에서 2번 이겼다. 피차 국력을 기울인 전쟁이고 국경선의 변경은 물론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이었다.

수 문제와 수 양제가 고구려를 두 번 침공해 패전한 끝에 수나라는 없어졌다. 기원 645년 당태종의 침공을 분쇄한 연개소문의 마지막 전승지역도 북경 인근 상곡, 어양이었고, 당 태종의 패주 이후 산동성 일대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당 고종과 신라의 연합 침공으로 고구려는 제7차 전쟁에서 패전해 기원 668년 역사에서 퇴장한다.

한편 백제는 14대 근구수왕(375년 즉위)이 수군을 창설하고 산동성으로 상륙하여 북으로는 선비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고 녹산(하얼빈)까지 점령했다. 남쪽으로는 지금의 강소, 절강 등지를 차지하고 있던 진(晉)을 쳐서 다소의 주, 군을 빼앗았는데 양(梁)서, 송(宋)서,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근구수왕 사후에 침류왕과 진사왕의 폭정으로 해외 영토를 모두 잃었다.

백제 24대 동성대왕(479년 즉위)은 490년 중국 위나라와의 두차례 전쟁을 압승하여 대륙영토 경략의 토대를 쌓았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광대하였기 때문에 구당서 백제전에서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기를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발해)를 건너 고려(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일본)에 이르렀다.”라고 했는데, 월주는 양자강 남쪽 회계로, 회계 부근 수천리가 모두 백제 소유였다.

백두산 정계비와 서간도, 북간도 획정

중국은 사방에 위치한 이민족을 남만, 북적, 서융, 동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중원의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등의 동이를 두고 멀리 동북방 송화강 유역에 도읍한 조선국을 지칭할 리는 없는 것이다.

부여, 고구려 등의 국가들은 동이의 후예이지만 그 지역에 대한 방위는 동북방이기 때문에 이 사실만으로도 조선의 만주와 간도에 대한 지역적 연고는 증명이 충분하다. 따라서 중국은 간도에 역사적 연고가 없는데도 현재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는 연고가 확실한데도 그 땅을 잃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간도 진출은 1368년 명나라 수립 이후에야 비로소 시도되었고, 17세기 초 청나라에 의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본격적인 분쟁 국면이 심화되었다. 이후 숙종 37년(1712년) 청나라의 국경회담 제의로 현 길림성을 관할하는 오라총관 목극등과 조선의 접반사 박권이 대표로 만나 백두산 천지 남쪽 10리 지점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백두산 정계비'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는 토문강과 송화강을 중심으로 서쪽의 서간도는 청나라로, 동북쪽의 북간도는 조선의 영토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연해주도 토문강과 송화강의 동북쪽으로 북간도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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