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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역사산책] 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이형모 발행인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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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1  18: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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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단군세기>는 고려 말의 대학자인 행촌 이암선생께서 서기 1363년에 편찬한 사서로써 BC2333년부터 BC239년까지 2,096년간 단군조선 마흔세 분의 단군과 대부여 네 분의 단군께서 나라를 다스렸던 치세를 기록한 편년체의 역사서이다.

고조선에 관한 자세한 역사서가 흔치않은 마당에 ‘단군세기’의 출현은 민족역사를 밝히는 서광이 되었다. 강단사학은 단군세기를 정사가 아니라고 폄하하지만, 저자 이암 선생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능가하는 역사적 실재와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다. 1911년에 계연수 선생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라는 4권의 역사책을 묶어 ‘환단고기’로 편찬했다.

단군세기 편찬경위

“행촌 선생께서 일찍이 천보산에 유람할 때 태소암에 묵었는데 한 거사가 있어 ‘저희 절의 서고에 기이한 옛 서적이 많습니다’하고 말하기에 이명, 범장과 함께 신서를 얻게 되었는데, 모두 환단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 온 진결이었다. (중략) 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화도 홍행촌으로 퇴거하신 후 스스로 홍행촌의 늙은이라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써서 가문에 간직하시었다.”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 -일십당 이맥)

행촌삼서(三書)는 고대 역사에 관한 ‘단군세기’와 민족정신과 문화를 집약한 ‘태백진훈’과 농업정책에 관한 ‘농상집요’를 말한다. 대학자였던 행촌 이암은 천보산에서 얻은 고서적들을 바탕으로 단군세기를 저술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의 사대주의 사관이 대세였고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상황에서 단군세기를 섣불리 세상에 내어 놓았다가는 오히려 이 서적과 내용이 사멸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가문에 비밀히 간직하도록 당부하셨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

행촌 이암이 살았던 고려 후기의 역사는 23대 고종 때인 1231년 최초의 몽골 침입을 시작으로 28년 동안 7차례에 걸친 몽골 침입을 맞아 전쟁을 치러야 했다. 1259년 화의 조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안정국면이 되기는 했지만 이후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몽골)의 사위국으로써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의 시호에 반드시 충성을 다짐하는 ‘충’자를 붙여야 했고, 왕의 이름마저도 몽골 이름을 가졌으며 머리를 땋는 변발이나 호복의 복장이나 결혼 풍습에 이르기까지 근 100년간이나 원나라 제도를 따라야 했던 불행한 시대였다.

1206년 테무진(칭키스칸)에 의해 통일된 몽골은 당시 중국을 제패한 여진족의 금나라를 1234년에 정복한 후 1238년의 러시아 정복에 이어 1241년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1264년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5대 황제로 등극하면서 나라이름을 원으로 바꾸고, 1279년에는 중국 남부의 남송마저 정복함으로써 지상최대의 정복국가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후 원나라 말기인 1351년 한족 농민군인 홍건적이 중국의 하북성에서 원에 대항하여 일어났는데, 같은 해에 고려 제31대 왕위에 오른 공민왕도 원나라를 배격하는 반원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공민왕 5년인 1356년 6월에 마침내 원의 년호를 폐지하고 모든 부문에 고려의 법도를 회복함으로써 거의 100년에 가까운 원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주국의 새 시대를 열게 된다.

행촌 이암의 시대적 역할

그러나 고려의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3년 뒤인 1359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행촌선생은 63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고려군 총사령관인 서북면도원수로 전장에 나갔고, 1361년의 2차 침입 때는 네 아들을 데리고 전장에 나가 상장군으로 용전했던 3남 이음을 잃게 된다.

고려가 원나라의 위세에 휘둘릴 당시 오잠, 유청신이라는 사대주의 간신배들이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으로 합치자고 주장할 때, 이암은 강력한 상소문으로 제압하여 국호를 지켜냈다.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어찌 국호를 폐하려 하는가? 세력이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찌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러한 행동거지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의 ‘죄 짓고 도망하는 행동’이요 국민이 아닌 자의 공언(헛소리)일 뿐, 마땅히 도당(당상관 모임)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 일십당 이맥)

이렇듯 행촌 이암선생의 전 생애는 100년에 가까운 원나라의 간섭시대 속에서 오직 이를 극복하여 자주 독립국 고려를 세우려는 애국의 일념으로 점철되었다.

오십년 관직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왕명을 출납하는 판밀직사사 겸 보태자감국(세자를 보필)을 역임한 이존비의 손자로써 약관 17세의 나이로 고려 26대 충선왕 5년(131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후 27대 충숙왕 - 28대 충혜왕 - 29대 충목왕 - 30대 충정왕 - 31대 공민왕까지 6대 왕을 모시는 동안 수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을 두 번이나 역임하는 등 공민왕 11년인 1362년까지 만 50년 동안 관직에 봉직했다.

이듬해인 1363년 2월에 강화도로 은퇴하여 10월에 단군세기를 지으시고, 그 다음해인 1364년 5월 5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이암의 자손들

이암의 4남 이강은 15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으나, 36세에 세상을 떠나고 외아들을 남겼으니 세종 3년에 좌의정을 지낸 용헌공 이원이다. 태종 때 우의정이 된 이원은 세종임금 즉위 일에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고, 임금 즉위 다음날 종묘에 나아가 새 임금의 즉위 신고를 대행했다.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많은 중책을 수행한 이원이 조부 이암의 단군세기를 세종대왕에게 진상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세종 7년 9월에 왕명으로 평양에 단군사당이 건립됐다. 세종대왕이 단군을 국조로 확신한 것이다.

이암의 현손이고, 이원의 손자로 중종 조에 찬수관으로 등용된 ‘일십당 이맥’이 있다. 그는 궁중 내각의 비장 서적을 접하고 차례로 엮어서 ‘태백일사’를 편찬했다.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망라했고, 환단고기 4권 중에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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