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과장법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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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과장법의 한계
  • 조현용 교수
  • 승인 2016.08.2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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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용(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 원장)

우리 인생은 과장법(誇張法)의 연속이다. 말을 하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과장 속에 둘러싸여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과장법이 인생에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말도 안 되는 부풀림에 깔깔대고 웃기 일쑤다. 집채만 한 호랑이라고 하고, 방이 운동장만 하다고 한다. 반대로 방이 코딱지만 하다는 표현도 쓴다. 덩치가 산만 하다는 표현이나 눈물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말에서 과장의 규모는 점점 확대된다.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과장 속에서 우리는 즐겁다.

과장법은 고정된 표현도 있지만 상황 속에서 늘 새로 피어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과장되게 표현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이야기할 때마다 과장된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징그러운 벌레를 보면 크기는 한없이 과장된다. 벌레가 크면 얼마나 크겠냐마는 표현에서는 웬만한 짐승의 크기로 확대된다. 벌레가 코끼리만 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실제 벌레의 크기가 아니라 공포의 정도를 가늠하게 된다.  

이렇듯 과장법은 강조를 위해서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과장은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의 크기를 보여주는 수사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없이 확대되기도 하고, 한없이 축소되기도 한다. 과장법으로 된 표현을 자세히 보면 황당할 때가 많다. 우레와 같은 박수,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 등과 같은 표현에서는 실현 불가능의 크기를 보게 된다. 박수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천둥소리와 같을까?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과장법도 한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우리 표현의 한계를 말하고 싶어서다. 우리의 감정을 나타낼 때는 과장법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칭찬이나 찬미, 찬양에는 과장법도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슬픔이나 고통도 과장법으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과장법의 한계를 느끼게 될까?

종교적으로 보자면 찬양은 과장법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어찌하면 신의 은혜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면 만족스러운 찬양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종교의 경전을 읽다보면 수많은 과장이 나오고, 이러한 과장으로도 다 형용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부분이 나온다. 과장법은 지나친 듯하지만, 사실 우리의 부족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부모님의 사랑은 어떤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어떤가?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아빠가 얼마나 좋으냐고 물어보면 ‘하늘만큼 땅만큼’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하늘만큼 땅만큼’이라는 표현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한다. 우주도 등장하고, 하늘 끝도 등장하지만 부모의 사랑은 표현할 길이 없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그런 것이다. 스승의 은혜도, 친구의 깊은 우정도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크기가 있다.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표현을 볼 때면 나는 그 감정의 크기에 마음이 아프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땅이 꺼지는 듯, 세상을 잃은 듯 우리는 아프고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의 병듦,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당하는 슬픔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고, 숨 쉴 수 없다고 표현하지만 이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과장법은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다. 과장법은 내 감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가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부모 형제, 아들과 딸, 선생님, 연인, 아내와 남편, 친구를 떠올리면서 내 과장법에는 한계가 있음을 생각한다. 과장법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한 내 마음을 본다. 고마움과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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