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구도의 춤꾼- 재미무용가 손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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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구도의 춤꾼- 재미무용가 손정아
  • 안동일 논설위원장
  • 승인 2005.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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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한국 알리는 문화 전령사
처연한 살풀이를 추어도 단아한 승무를 추어도 손정아의 춤사위에는 한국적 단아함과 현대적인 화려함이 묻어난다. ‘전통과 현대’라는 상반되는 듯하지만 필경 합쳐져야 하는 화두를 끈질기게 붙들어온 까닭이다. 오랜 재미활동을 통해 우리 문화의 전령사로 활약해 왔던 그녀가 이제 우리 옛 여인 ‘황진이’로 고국에 돌아왔다.

   
재미동포 출신 한국 무용가 손정아씨가 지난 4월13일 하얏트호텔서 열린 디너쇼 황진이를 성황리에 공연함으로써 그의 귀국을 화려하게 세상에 알렸다.

이날 공연장에는 국내외 각계각층의 쟁쟁한 인사들이 참석해 그녀의 현란한 춤사위와 구성진 노래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오국광 주한 중국대사, 이재정 평통부의장, 김덕룡의원, 황우려의원, 김혁규의원, 이성림예총회장, 안충승 현대중공업사장, 이광규재외동포재단이사장, 줄리 칸 미문화원 부원장 등이 그 면면. 800석 객석은 꽉 찼다.

‘퀸즈페스티발’ 정착 공헌

손정아. 한국 관객들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이미 그녀는 세계 각지의 찬사를 받으면서  공연을 해왔던 30년 춤 인생의 베테랑이다. 무엇보다 미국에서의 활동은 그의 춤인생 절반을 바친 문화 전령사로서의 공을 쌓게 한 의미를 담은 각고의 활동이었다.

19살 나이에 세계 속에 우리 춤 사위를 심겠다는 꿈을 품고  홀홀 단신 도미했던 그녀. 그녀의 미국 활동은 지금도 그곳의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각인돼 있다.

“다른 무엇보다 저 스스로는 미국내 소수민족의 축제인 ‘퀸즈페스티발’을 정착시키는 데 큰 힘을 쏟았고 그 행사에 매년 참가해 적극적으로 우리 문화를 알려 온 것이 제가 한 일 중 큰 일의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이제는 뉴욕의 명물로 자리잡은 퀸즈 페스티발을 정착시키는 데 그녀의 공은 지대하다.  이 때문에 루돌프 줄리아니 당시 뉴욕 시장은 그녀의 열성에 각별한 호의를 보였고  세 차례나 감사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자, 그녀의 노고에 대한 존경이었다.

“또  잊지 못할 공연으로는  92년  LA폭동 때 뉴욕 할렘에서 한 공연이 있습니다. 한흑 화합 목적이었죠.  처음엔 극장 입구에 서 있던 흑인들이 째려보기도 하고 해서 무서웠지만 공연을 하고 나자 우리는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하나가 되었던 기억에 남습니다. 예술의 힘이죠.”

그녀의 뉴욕에서의 예술 생활은 부러움 속에서 각오로 피어난 측면이 크다.

“똑같은 아시안이었지만 중국은 차이나타운 중화공소에 큰 문화센터가 있었고, 일본인에게는 재팬소사이어티가 있어서 문화행사며 연구에 대한 지원이 활발했던 것이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특히 재팬소사이어티는 뉴욕 유엔 건물 건너에 큰 문화원을 운영하고 있어 거기서 정기적으로 문화 행사를 하는데 그 건물 앞에 설 때마다 울컥 눈물이 나더군요. 화도 나고. 국력이 문화를 뒷받침해주고 문화는 국력을 알리는데 우리는 아직 그런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뉴욕에서의 한인 예술인들은 모든 것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 비즈니스 하드웨어적인 측면까지 신경 써야 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예술의 불모지였던 미국.  그녀의 가장  큰 활동은 역시 후진양성이었다. 서툰 영어지만 손짓 발짓을 섞어 미국 학생들에게 한국의 전통 춤과 음악을 알리기 위해 강의도 수없이 했다. 그리고 ‘한국무용회’를 설립해 한인 동포 사회의 학생들도 열심히 가르쳤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우리 피가 돌고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디에 살든, 절대 우리 것을 버릴 수 없음도 깨달았다. 그렇게 손정아에게 배운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찾았고, 자신감을 회복하고 미 주류 사회에서 자기의 미래를 열었다.

그녀의 국악 인생은 사촌언니였던 고 송경란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국립국악원1기생으로, 서른여덟의 나이로 작고하기까지 예인으로 살았던 송경란은 그녀에게 “자기보다 더 잘할 것”이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남겼다.
그렇게 어린 나이 일곱에 시작한 국악이었다.

‘한국무용회’서 후진 양성

열한 살에는 인간문화재 27호 고 한영숙 선생께 스카우트되어 사사했고,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춤과 노래와 악기를 두루 공부하는 ‘종합 국악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서양 춤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재즈와 발레도 배웠다.             

고국에 돌아온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아직도 미국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닙니다. 아직 그곳에 집도 있고 또 무엇보다 제 분신이기도 한 한국무용회가 존속하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울에 오면 제 춤사위가 더 힘을 받는 그런 느낌을 받아왔습니다. 면면히 흐르는 우리의 정서 에너지, 기를 다시 충전받는다고 할까요. 그리고 서울에는 존경하는 스승, 선배들 그리고 절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황진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황진이는 훌륭한 예술가였으며 유불선 사상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아완성을 위해 구도적 삶을 살아간 여인입니다. 그런 황진이를 제대로 알리고 구현해 내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그녀는 ‘황진이’ 국악가요 앨범을 내놓기도 했다. 수록된 곡들은 경기민요의 창법에 대중적인 톤을 가미해,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황진이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은 아무도 그 공연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황진이의 절창의 시를 사람들이 늘 부르고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춤꾼으로 살겠다는 그녀의 꿈은 서울과 뉴욕에 국악박물관과 국악전문공연장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고국서 춤사위 더 힘받아

그러기 위해 ‘황진이’를 세계로 들고 나가 황진이의 삶과 시를 무용으로 담아 전파하겠다고 다시금 자신을 다잡고  있다. 춤꾼의 춤에는 그가 살아온 삶과 철학이 배어나기 마련이다.
춤 인생이 때로 섬처럼 고독할지라도, 또 그만큼 사람들의 가슴을 깊이 적셔줄 것이다.

그리고, 그 값진  걸음을 우리가 지켜보는 한,  춤꾼의 행로도 결코 외롭지만은 않으리라.
◇손정아 약력 △인간문화재 27호 한영숙 선생 사사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 △뉴욕 R.K.D 락클랜드 대학 졸업 △콜롬비아대 출강 △케네디가 공로상 △뉴욕 시장 표창 (3회)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기념 공연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 취임축하 공연 △유엔 창립 50주년 유엔의 날 공연 참가


andongil_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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