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검붉다는 말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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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검붉다는 말의 매력
  • 조현용 교수
  • 승인 2023.06.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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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비통사적 합성어(非統辭的 合成語)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문법 용어를 써 놓고 뒤에 매력이라는 단어를 붙여 놓은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문법이, 용어가 매력적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달리 비추일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용어에 매력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비통사적 합성어를 좀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앞에 비(非)가 붙어 있으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통사적 구성이 아닌 합성어라고 설명하면 간단합니다.  즉 우리말 문장 구성에 맞지 않는 합성어입니다. 예를 들자면 동사나 형용사가 뒷말을 꾸미려면 어미가 필요합니다. ‘넓은 집’처럼 표현해야 통사적으로 맞는 겁니다. ‘넓집’이라고 하면 이상하지요. 그런데 우리말 단어 구성을 보면 어미 없이 합성이 되는 예들이 있습니다. 뒤의 명사를 꾸며주는 말로는 ‘늦잠, 꺾쇠’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것을 통사적으로 바꾸면 ‘늦은 잠, 꺾은 쇠’가 되어야 합니다. 좀 어색하지요.

또한 동사나 형용사가 이어질 때는 주로 ‘-고’가 붙습니다. 즉 넓다와 크다가 합쳐지면 ‘넓고 크다’라고 해야 합니다. 만약 ‘넓크다’라고 하면 이상하지요. 그런데 우리말에는 ‘-고’ 없이 어간만으로 합성이 되는 예들이 있습니다. 높고 푸른 것을 높푸르다고 하고, 검고 붉은 것을 검붉다고 합니다. ‘-고’가 붙지 않으면서 오히려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검고 푸른 것과 검푸른 것은 느낌이 다릅니다. 

이런 구성의 합성어는 지금보다 중세 국어에 훨씬 많이 나타납니다. 접두사라고 할 수 있는 말 중에도 비통사적 합성어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예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치-’를 들 수 있습니다. ‘치밀다, 치솟다’의 접두사 ‘치’는 ‘치다’에서 온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만약 통사적이 되려면 ‘치어’ 즉 ‘쳐’로 바뀌어야 합니다. 접사는 원래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말에서 문법적 기능을 하는 말로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치’가 비통사적이어서 더욱 접두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비통사적 합성어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요? 저는 이 힌트를 천자문 해석에서 찾았습니다. 사실 천자문은 쉬운 책이 아닙니다. 특히 천자문을 아이가 배우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관련된 고사(古事)가 많고, 어휘도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첫줄 해석부터 말문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첫 네 글자는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의미인데 만만치 않은 깊이가 느껴집니다. 땅이 누런 것은 이해가 되는데, 하늘이 검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검다는 표현에 ‘흑(黑)’을 쓰지 않고 ‘현(玄)’을 쓴 것도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현의 뜻을 옛 책에서는 ‘감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현의 다른 뜻으로는 ‘아득하다’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말 중에서 ‘검고 아득하다’에 해당하는 단어 ‘까마득하다’가 현의 가장 알맞은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까마득하다는 감다와 아득하다가 합쳐진 말로 보입니다.

그런데 현에 대한 해석을 일본책이나 한자 자전에서는 ‘검고 붉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검기도 하고 붉기도 하다는 의미일 겁니다. 우리말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적절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검붉다’라는 비통사적 합성어입니다. 검붉다는 검지도 붉지도 않은 색으로 검붉은, 묘한 색입니다. 검은 듯 붉고, 붉은 듯 검은 색입니다. ‘검푸르다’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검푸른 바닷가의 느낌은 ‘검고 푸른’ 바다가 아닙니다. 높푸르다는 어떤가요? 높기에 더 푸른 느낌을 더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높고 푸르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렇듯 비통사적 합성어는 나뉘지 않는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세국어에는 ‘생사(生死)’를 나타내는 순우리말 표현 ‘죽사리’가 있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살이입니다. 우리말 표현을 들여다보면 참 묘합니다. 사는 것을 앞에 두지 않고 죽는 것을 앞에 두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죽사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어만 봐도 둘은 떨어뜨릴 수 없는 느낌이 납니다.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할 때도 있고, 죽어도 언제나 우리 속에 살아있기도 합니다. 죽사리라는 단어가 참 매력적입니다. 앞으로도 삶 속에서 비통사적 합성어를 만날 일이 있을 겁니다. 그 단어들을 통해서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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