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깨닫다] 리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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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깨닫다] 리을 이야기
  • 조현용 교수
  • 승인 2020.07.0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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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조현용(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리을 음은 우리말 첫소리에서는 회피하는 음입니다. 두음법칙이라고 하는 말이 리을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리을 음을 첫소리에서 안 쓰려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리을 음을 ‘R, L’로 구별까지 하니 한국인에게 가장 어려운 음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우리말에도 리을로 시작하는 어휘가 있습니다. 이 어휘는 대부분 외래어입니다. 라면이나 라디오, 리본 같은 말이 대표적이겠네요. 너무 많이 써서 이제 ‘라면’ 같은 말은 우리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대학교에 다닐 때, 조금 엉뚱한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리을로 시작하는 순우리말을 찾아본 겁니다. 찾아보나마나 실패할 조사였습니다. 두음법칙이 있는 우리말에서 리을로 시작한다는 것은 외래어라는 말이고, 그것은 순우리말이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조사였지만 그 김에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헛수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끝까지 찾아보았을 때 한 단어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리을’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물론 리을(梨乙)도 한자로 표기가 가능합니다만, 이는 어쩔 수 없이 표기했던 것이지 한자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리을이라는 글자는 리을이라고 할 때 새 ‘을(乙)’ 자와 닮아있습니다. 한자를 참고했다면 분명히 새 을을 참고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리을이라는 한자에도 새 을이 들어가 있네요. 글자 이름을 만들 때도 아마 고려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리을은 글자의 모양처럼 굽이굽이 흘러가는 느낌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구자 중에는 리을을 기역에서 시작하여 니은으로 끝나는 음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글자가 기역과 니은을 합쳐놓은 느낌이기도 하죠. 발음을 해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납니다. 기역 발음을 하려는 혀 모양처럼 입천장 쪽에서 시작하여 니은 발음의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니은과 리을은 혀의 위치가 비슷합니다.

우리말에서 리을은 첫소리보다는 끝소리에서 매력적입니다. 리을은 울림소리면서 유음(流音)입니다. 흘러가는 음이죠. 리을은 글자 모양도 그렇게 생겼지만 굴러다니거나 흘러가는 느낌을 줍니다. 강물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어옵니다. 굴러가고, 돌아가고, 올라가고, 끝없이 움직이는 느낌입니다. 살아있는 거죠. 솔솔 바람이 불고, 이야기가 술술 나오고,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이 아닌가요?

흥미로운 리을은 고려가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려가요를 보면 후렴구에 알 수 없는 소리가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산별곡에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가 대표적이지요. 여기에도 리을 음이 잔뜩 보이네요. 이 후렴구는 대국(大國)이라는 고려가요에도 ‘얄리얄리얄라 얄라셩 얄라’로 비슷하게 나옵니다. 대국은 무가(巫歌)입니다. 무당의 노래라는 말입니다. 고려가요에는 무가가 많습니다. ‘나례가(儺禮歌)’의 경우에는 아예 후렴구가 ‘리라리러 나리라 리라리’입니다. 나례가는 무당이 역귀를 쫓기 위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무가에서 리을 음이 보여주는 강력한 주술적 힘이라고나 할까요? 대왕반(大王飯)에는 ‘디러렁다리 다리러 디러리’가 나오고 내당(內堂)에는 ‘다로럼 다리러’가 후렴으로 나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황반(城隍飯)이라는 고려가요인데, ‘다리러 다로리 로마하 디렁디리 대리러 로마하 도람다리러 다로링 디러리 다리렁 디러리’로 긴 후렴구가 나옵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군마대왕(軍馬大王)이라는 고려가요입니다. 군마대왕은 아예 가사가 없이 전부 주술적인 소리로만 이루어집니다. ‘리러루 러리러루 런러리루, 러루 러리러루, 리러루리 러리로, 로리 로라리, 러리러 리러루 런러리루, 러루 러리러루, 리러루리 러리로’ 구음(口音)으로 보는 연구가 많고, 현악기의 소리일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구천(九天)이라는 무가도 ‘리로 리런나 로리라 리로런나 로라리 리로리런나 오리런나 나리런나 로런나 로라리로 리런나’로 이루어진 것으로 봐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오히려 무가라는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신이 들렸을 때 마치 방언(方言)을 하듯이 내는 주술적인 소리를 담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리을 음은 흘러가는 음이기는 하지만 강렬한 힘을 담고 있는 특별한 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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