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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 건국과 난민 귀환 문제 (상)
공일주 중동아프리카 연구소장  |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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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17  12: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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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일주 중동아프리카연구소 소장
이스라엘 영토와 팔레스타인의 영토

이스라엘의 공항이나 요르단 국경을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려고 하면 우선 이스라엘 국가의 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고 팔레스타인 영토로 곧장 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지금까지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랍 이슬람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2005년 텔아비브의 이스라엘 한국 대사관에 팔레스타인 대표부 사무실을 두었다가 2014년부터 서안의 라말라로 이전했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중해 동쪽 평지의 남쪽 영토와 요르단 강 계곡 지역까지를 가리킨다고 했다. 동일한 영토가 이스라엘의 땅 또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불린다. 1920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에 속한 영토는 현재의 이스라엘 땅과 요르단(transjordan) 땅을 포함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어를 사용하고 무슬림과 소수의 기독교인이 살고 있고, 이스라엘은 유대 종교를 갖고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지만 러시아와 아프리카 등 다른 국가에서 온 유대인도 있다.

아랍 무슬림이 7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땅에는 무슬림들이 없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한 이후에 ‘팔레스타인 사람(filastini)’이라는 말은 이 지역 영토에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주민을 가리켰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영토라고 하면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역(북쪽 제닌에서 남쪽 헤브론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합의와 그 이후

1947년 유엔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에게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제안했으나 아랍인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아랍 연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유대인들은 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한 야세르 아라파트는 1948년 아랍 이스라엘 전쟁에서 무슬림형제단과 같이 이스라엘을 대항해 싸웠다.

팔레스타인의 전 대통령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는 자신이 오슬로 합의에 서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슬로 합의는 서명 후 25년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가는 길이 ‘출구 없는 여울목’과 같아 보인다. 서명 당시 아라파트나 팔레스타인 당국자들이 이 합의에 반드시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곧 이은 걸프 전쟁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큰 변화를 주었다. 미군이 2003년 이라크에 들어간 이후 한동안 국제 뉴스에서 팔레스타인 뉴스는 이목을 끌지 못했다.

마흐무드 압바스는 1993년 오슬로 합의는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가는 다리가 될 수도 있지만 파국이 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슬로 합의에 서명하면 1998년 팔레스타인 국가가 건설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 합의(잇티파끄) 이후에 더 복잡한 일들이 생겨났다. 1994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70%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이 되자 예루살렘의 최종적 지위와 1948년 고향을 떠난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권리에 대한 협상(무파와다트)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2003년 EU, UN, 미국, 러시아가 제안한 평화의 로드맵은 팔레스타인 의 폭력이 종식되고, 서안지역에서 유대 정착촌의 건설을 동결시키고 2005년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운다는 계획안이었다.

그러나 2007년 미국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중동평화회의 결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2008년 말까지 평화협정(무아하다 살람)에 비준하기로 했으나 결렬되고 말았다. 2008년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 때문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아나폴리스 협상을 철회해버렸다. 2010년 팔레스타인 대통령 압바스와 이스라엘의 총리 네탄야후가 워싱턴에서 대화(무하다사)를 재개했다. 2013년 미국이 회담을 주선했으나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문제로 회담은 무산됐다. 그리고 2016년 안보리가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의 중단을 요구했다.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변경

미국은 2017년과 2018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을 바꾸었다. 미국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지원금을 중단하니, 팔레스타인은 미국과의 접촉을 거부했고 평화 프로세스의 중재자로서 미국의 역할을 거부했다.

일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오슬로 합의 이후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오슬로 합의는 공적으로 취소돼가는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슬로 합의에 참여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오슬로 합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합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합의를 만들거나 합의문 일부 사항을 제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슬로 합의를 단 한 번에 취소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알샤르끄 알아우사뜨(9월 13일 3면)는 오슬로 합의를 팔레스타인이 삼킨 칼이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 됐던 것은 유대인 정착민의 수가 4배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오슬로 합의 이전인 1992년에 10만 명이었던 유대인 정착민이 지금은 40만 명이 됐다. 오슬로 합의 이후 25년이 지난 이스라엘은 오슬로 합의가 이스라엘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의회에서 오슬로 합의는 61:51로 가까스로 통과됐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이 합의가 역사상 가장 나쁜 합의라고 했다. 1967년 이후 오슬로 합의 때까지 이스라엘인 415명이 피살되고 오슬로 합의 이후에는 1700명이 피살됐다.

오슬로 합의 이후에 이스라엘의 폐해가 더 심각했다. 그래서 어떤 이스라엘 지도자도 오슬로 합의를 영구적인 합의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비전을 갖지 못했다. 결국 이스라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과의 협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요르단 강 서안과 그린라인의 동부 예루살렘 지역에 정착민을 확장해 왔다. 지금은 그린라인 뒤쪽에 이스라엘인이 80만 명이 거주하고 있어서 항구적인 합의를 어렵게 하고 있다. 7천 명의 팔레스타인이 죽고 유대인 정착민이 80만 명으로 확대된 것 때문에 두 ‘국가(이스라엘, 팔레스타인)’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점령지 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행정 관할 지역

이스라엘은 치안상의 이유로 2000년 서안에 분리장벽(separation barrier; 지다르 아질)을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이 장벽을 인종차별의 벽이라고 부른다. 1995년 2차 오슬로 협정에서 합의한 영토 구분은 세 개(A, B, C 구역)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고 2013년에는 거주 영토의 크기가 달라졌다. A구역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관할하고 B구역은 팔 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이스라엘이 행정관할하고 C구역은 이스라엘 정착촌을 포함하므로 이스라엘의 행정관할하에 두었다.

A구역은 8개의 팔레스타인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인데 나블루스(세겜), 제닌, 뚤카람, 깔끼야, 라말라, 베들레헴, 여리고 그리고 헤브론 지역의 80%가 해당되고 2013년에는 서안의 18%를 차지했다. 이 구역에는 모든 이스라엘 시민이 들어갈 수 없다. B구역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대민 통제를 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합동으로 치안을 통제한다.

2013년 B구역은 서안의 22%를 차지했고 약 440개 팔레스타인 마을과 그 주변 땅을 소유하고 이스라엘 정착촌은 없다. C구역은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고 이스라엘 군인이 검문소를 지키고,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접근이 제한되거나 금지된다. 이 구역은 이스라엘이 대민 업무와 치안을 통제하고 2013년 C구역은 서안의 63%를 차지했다. 그런데 가자지구와 서안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로 분리돼 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거처와 건물은 서안의 라말라에 있다.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서안 지역의 파타흐의 불화

‘하마스’는 아랍어로 ‘하라카 알무까와마 알이슬라미야(이슬람 저항 운동)’라는 말에서 첫 자(H,M,S)를 따서 ‘하마스’라고 불리어 왔고, 파타흐는 ‘하라카 알타흐리르 알와따니 알필라스띠니(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라는 말의 첫 자를 뒤에서부터 쓰면 F, T, H이므로 ‘파타흐’라고 불렀다. 하마스(1987~)는 무슬림 형제단의 이데올로기(사상과 신념)를 가진 이슬람주의자 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대항해 무력으로 저항해 왔다. 파타흐(1965~)는 1967년 전에 점령한 땅에서 이스라엘이 국가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무슬림들이다.

요르단 강 서안의 라말라에 본부를 둔 파타흐는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에게 패했고 두 라이벌 간의 긴장이 가자지구에서 많은 폭력적 충돌을 가져왔다. 이런 파당적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2007년 초 파타흐와 하마스가 연립 정부를 조각하기로 합의했다. 그 해 6월 하마스는 무력으로 가자 지구를 장악해버렸고 파타흐가 이끄는 서안 지역과 결별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마흐무드 압바스는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파타흐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 한 하마스와 화해하기를 거부했다. 2014년 하마스가 통일 정부를 구성하는데 파타흐와 화해 거래(deal)에는 동의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

2006년 이후 가자 지구는 호전적인 하마스에 의해 자치됐고 주민들의 식량과 전기와 연료 부족을 겪었다. 2006년 이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본거지로 하는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공격을 막으려고 가자 지구에 대한 육상과 해상 교통을 통제해 왔다. 2017년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서안의 파타흐가 두 개의 관할 지역으로 나뉜 지 10여년이 지나서 화해를 위한 거래(deal)에 참여했다.

그 거래는 가자지구의 행정적 통제권을 파타흐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두 상대가 화해 과정의 일환으로 가자 지구의 공공 기관을 라말라에 본부를 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게 이양하고, 가자와 이집트 사이에 놓인 라파흐 국경의 통제권을 서로 논의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하마스의 보안군과 25,000명의 군조직의 문제가 화해를 막는 중요 이슈가 되었다. 이집트는 오랫동안 둘 사이의 화해에 중재 역할을 해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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