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큰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들은 ‘아기는 씻기는 만큼 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이를 정성들여 씻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씻기면 정말로 다음날에는 좀 더 큰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아이는 더 맑은 모습으로 웃죠. 어른들의 정성이 아이를 자라게 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또 어른들은 아이가 크려고 아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이 펄펄 나니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아이가 자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아이가 아프고 난 후에는 실제로 어른스러워진 모습이 되곤 합니다. 젖살도 빠지고, 어린 모습들을 조금씩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이는 아픔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밤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장통’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히는 모르나 관절이 자라면서 아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라는 것에는 아픔이 따르는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습니다. 우리는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먹는다고 합니다. 사실 떡국을 먹는다고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겠지만, 음식이 나를 자라나게 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음식이 소중한 것은 나를 자라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음식을 쓸데없이 낭비하거나 배가 부른데도 꾸역꾸역 먹는 것은 자라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행위들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먹어야 하겠죠.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자라는 일을 멈추고 있습니다. 난 어른이니까 다 자란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른이니까 육체적으로는 더 자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아무리 밥을 먹어도 키는 더 자라지 않고 배만 나온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안다는 농담도 그래서 나온 것이겠죠.
허나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자라나야 하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때가 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을 씻으면서 더 자라있을 자신의 모습을 그려야 합니다.
내 더러움을 조금씩 덜어가며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조금 더 맑아진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나로 인하여 행복할 수 있도록 더 맑아져야 할 겁니다.
살다 보면 아픔이 참 많습니다. 어릴 때는 육체적으로만 아픈데, 크면서는 온 몸과 온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내 몸과 마음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아픔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픔은 두렵지만 고맙기도 한 것입니다. 굳이 아프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픔이 두렵지만도 않습니다.
저는 ‘자라다’라는 단어가 ‘잘’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서 자라나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잘’ 생각하고 행동도 해야 합니다. 내 어설픔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함을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모자라다’입니다. ‘모자라다’라는 말은 부족하다는 말도 되지만 어리석다는 뜻도 됩니다. 올바로 못 자랐다는 의미이죠.
저는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자라나기를 소망합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라나려고 노력하려 합니다. 저녁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난 오늘 얼마만큼 자랐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