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③]반기문 총장 만들던 외교력 어디로...
상태바
[특집-③]반기문 총장 만들던 외교력 어디로...
  • 허겸 기자
  • 승인 2015.03.20 16: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潘외교-趙단장의 극일(克日) 솔루션

  일본의 물밑 교섭력을 저지하고 우리의 의사를 관철한 사례는 외교적으로 풍부하다. 그중에서 조태용(趙太庸) 전 북핵외교기획단장(현 외교부 1차관)과 반기문(潘基文) 전 외무장관(현 유엔 사무총장)이 일본의 저지를 뚫고 한국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 배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사례는 눈여겨볼 만하다. 

▲ 지난 2011년 호주 시드니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의전차량의 번호판이 '넘버 1'으로 표기돼 있다.(사진=허겸 기자)
  지난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 외무부에 입부해 40여년째 외교관의 길을 걷고 있는 반기문 총장과 1980년 외무고시 14회에 붙은 뒤 30여년간 공직에 몸담아오고 있는 조태용 1차관이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들 두 외교관이 참여정부 시절 극일(克日) 합작솔루션으로 일본의 벽을 넘어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솔루션이 효험을 발휘한 까닭에 한 명은 외교관으로서 '꿈의 보직'인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고, 다른 한 명은 북핵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는 외교가의 평가를 밑천으로 외교 1차관에 올랐기 때문이다.

  두 외교관이 각별한 신의를 쌓은 시기는 반 총장이 한국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태용 차관은 북핵외교기획단장으로서 반기문 장관과 보조를 맞췄다. 이 무렵 글로벌 화두이자 한국으로선 여간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이슈는 다름 아닌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시도였다. 이에 더해 일본은 납북자 문제로 부시 행정부의 매파와 궤를 같이하는 초강경대응책을 구사했다. 유난히 호전적이었던 일본의 대응은 납북자 문제가 점차 접점을 찾아가면서 유엔 사무총장 때문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됐었다. 마치 민감한 대북 이슈를 기화로 반 장관 흔들기에 나서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반 장관은 일본식 해법이 북핵 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힘들다고 믿었고 이 생각은 조 단장도 같았다. 일본이 제시한 유엔 헌장 7조의 원용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안보 상황에 예기치 않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 것이다. 순간의 오판이 자칫 한반도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그 배경에 유엔 사무총장 인선이 변수로 작용됐다.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핵 문제가 거대 담론처럼 여겨졌지만 핵 문제가 한국 외교관가에서는 사상 첫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선출을 위한 물밑 움직임이 활발했던 것이다. 대륙별 안배에 따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차기 유엔 사무총장이 나올 유리한 여건이 이미 조성됐었고 사무총장 선출을 위한 1차 예비투표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올 때였다.

  한 고위급 정보소식통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조태용 단장의 지략은 제갈공명 수준으로 뛰어났다"고 회고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조 단장은 6자 회담 참여국인 일본 정부에 한국과 사전 논의 없이 초강경 대응책을 고집하는데 대해 정권 차원의 실망감이 배어 나오고 있다는 전갈을 보냈다. 당시 일본 측 초강경 대응안의 배후에는 자민당 중진이자 내각 관방장관으로 있던 아베 신조 의원(현 일본 총리)이 있었다. 다시 외교부는 일본과 중국 정부의 미묘한 관계를 활용하는 교란 작전을 구사했다. 조 단장은 중국이 북한과의 입장을 고려해 북핵 6자 회담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되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시기에 중국을 빼고 5자 회담으로 가자는 중지를 모았다. 상대적으로 일본의 존재감을 부각시킴으로써 협력이라는 반대급부를 도모하려는 외교적 포석이었다.

▲ 주호주대사 시절 조태용 제1차관(사진=재호주 사진작가 신상현)
  하지만 북핵 문제는 산 너머 산이었다. 이번에는 미국이 참여정부가 유엔의 강경 해법을 유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데 대해 우려를 나타내자 일본과 미국을 동시에 예우하는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복지부동이 계속된다는 전제 아래 쿠알라룸푸르에서 한미일 외무장관 3자 회담으로 방향을 전격 수정하기로 한 것.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북핵에 관한 일본의 강경한 어조를 다소 누그러뜨리는데 주효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 단장을 비롯한 외교부 내의 북핵 실무라인이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한국 정부에 대한 우호협력을 견인하고 있을 무렵 청와대가 외교실무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의 유엔 사무총장 진출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후문이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일어나도록 방치하는 일본식 방안을 저지하겠다는 복안도 있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2006년 2월 일찌감치 유엔 사무총장 출마 의사를 공표한 반 장관은 이 와중에 출마를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반 장관은 샤시타루르 유엔 사무차장(인도)과 자얀타 다나팔라 사무차장(스리랑카), 수라끼앗 태국 부총리 등 경합하는 예비후보를 차례로 따돌리고 뉴욕 입성에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1~3차 예비투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1개의 반대표가 나왔다. 통상 만장일치로 추대해 온 관례에 비춰볼 때 이 반대표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었다. 훗날 한 개의 반대표는 일본이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상임이사국 진출을 꾀하는 일본으로서는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 직위에 오를 경우 장애요소가 된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존 볼튼 당시 주유엔 미국대사는 1년 뒤 발간한 자서전에서 3차 투표 다음날 오시마 주유엔 일본대사를 만나 반대표를 재고하라고 요청했을 때 일본이 반대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마지막 안보리 찬반투표가 진행될 무렵 이웃나라 일본은 아베 장관이 총리직에 오르며 또 다른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고 대북정책에도 유화적인 제스처가 가미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까지 조 단장은 북핵 이슈의 의도하지 않은 돌출 변수를 효과적으로 틀어막으며 반 장관의 유엔 총장 출마를 보필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반대표는 기권표로 바뀌어 반 장관은 찬성 14표, 기권 1표를 획득하며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허겸 재외동포신문 편집국장 (전 뉴시스 시드니 특파원, 전 호주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