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②]일본 '국제 로비력' 미국에서 通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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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②]일본 '국제 로비력' 미국에서 通한 듯
  • 허겸 기자
  • 승인 2015.03.20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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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한중사회 ‘위안부 소녀상 건립’ 움직임 저지한 일본의 막후 실력

  일단 일본의 판정승으로 가닥이 잡혔다. 일본 지지(時事)통신은 미국 의회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수락하는 쪽으로 최종 조정에 들어갔다고 20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초청 연설의 키를 쥐고 있었던 존 베이너 하원의장(공화)은 금명간 공식 초청장을 주미일본대사관의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대사에게 전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 외교가로서는 한가닥 실낱 같은 희망이 사라지게 됐다. 외교부가 무능한 대응으로 판정패를 당하는 사이 일본은 보이지 않는 치열한 물밑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써 아베 총리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자민당)의 하원 연설 이후 54년 만에 미 의회에서 연설하는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 일본 총리의 상하원 합동 연설은 전례가 없던 일이며, 하원에서만 3차례 연설한 바 있다. 지난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는 미 의회의 반대 서한으로 연설이 수포로 돌아갔었다.

  일본의 로비력이 국제사회에서 발휘된 것은 비단 이번 사례뿐만이 아니다. 1년 전인 지난해 4월 호주 시드니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당시 한중 커뮤니티는 연대체를 결성, 대표적 한인촌인 스트라스필드에 위안부 소녀상을 건립하고자 했다. 친한파 의원들을 상대해온 한중 커뮤니티는 다소 안이하게 대처했고 결국 시의회에 상정된 건립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 호주 한중 커뮤니티의 위안부 건립 움직임을 민첩하게 보도한 산케이신문(産經新聞). 이 보도는 관방장관의 기자회견을 이끌었고 뒤이어 극우 여론을 조성하며 일본 정부가 본격 로비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사진=산케이신문 인터넷 캡처)
  일본 본토는 호주에서 반일(反日) 기류가 확산될 때부터 예의주시했다. 극우 성향의 일본 유력지 산케이신문(産經新聞) 등이 한중연대가 일본의 전쟁범죄 사과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본격화한 사실을 긴급 타전하며 국내에 알려 국론을 조성했다. 주호주일본총영사관 고위 관계자는 직접 스트라스필드 시의회를 내방, 로비를 벌였다. 외교 관례상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넘어선 압박 공세로 풀이됐다. 

  또한 지지통신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위안부 소녀상 철거 요구 소송이 일고 있어 호주 한중단체의 위안부 동상 설치 움직임은 ‘새로운 파문(新たな波紋)’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이 호주에서 일고 있는 반일 기류 확산에 날선 시각을 보일 무렵 일본 정계도 움직였다. 당시 산케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관련 보도가 나간 직후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는 여태껏 위안부 문제를 정치 외교적 문제로 다룰 게 아니라는 입장을 적절하게 견지해왔다”며 중립적인 뉘앙스의 발언을 던져 사태 확산을 우려하고 여론을 가라앉히는 듯 했다.

  그러나 일본 네티즌들은 조직화된 움직임으로 위안부 소녀상 건립 저지에 뛰어들었다. 호주 한중사회에서 중앙 정치무대로 반일 기류가 확산되는 가운데 나온 견제 성격의 온라인 시위였다. 연방 자유당 리드 지역구의 친한파 크렉 론디 의원과 뱅스 지역구의 데이비드 콜맨 의원이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훼손하고 우정과 화합의 정신에 반한다’고 공동 성명서를 낸 뒤의 일이었다. 여기에다 일본 언론사 싱가포르 특파원이 시드니 소식을 자세하게 보도하면서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 지난해 4월1일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시의회에서 열린 위안부 소녀상 건립안 회의.(사진=호주동아일보)
  한국 측이 다소 안이했다는 지적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본 열도가 술렁이고 있었지만 한중사회는 위안부 소녀상 건립안의 통과를 낙관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150명이 스트라스필드 시청사 강당에 모였지만 긴장감이 팽배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 인사들이 진지하게 정견발표를 경청하며 추이를 지켜보는 와중에도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온통 노란색 옷으로 꽃단장한 채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는가 하면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는 전통 갸루(ギャル) 화장을 한 여성도 있었다. 회의 도중에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몰입도를 떨어뜨린 이 여성의 존재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일본 측은 철저한 준비로 논리를 선점했다. 호주 시의원들이 듣고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단어들로 한국의 주장을 조목조목 짚어갔다. 동북아시아 역사에 상대적으로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호주 시의원들로서는 내심 위축될 수밖에 없는 요소이다. 한국 측 정견발표 인사들에게선 일본처럼 논리적인 대응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게 참석자들의 중론이다. 한국 측은 사실과 당위만을 언급했을 뿐 정작 건립안 통과의 키를 쥐고 있는 시의원들을 설득하는데 미흡했다는 의견이었다.

  한국 측은 “위안부는 ‘비극(tragedy)’적인 일이며 이들이 강제로 성노예로 부역했다”고 강조하고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위해 2000명이 서명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표에 나선 일본 측 20살의 청년은 유창한 영어로 일본은 청원서에 1만 명이 서명했다고 반박한 데 이어 위안부 소녀상 건립은 일본에 대한 ‘인종차별(racism)’이라고 규정, 논리싸움에서 앞섰다. 심지어 보편적 인권에 비춰 소녀상 설립은 또 다른 범죄(another crime)가 된다는 억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시의회가 ‘주정부 및 연방정부의 의견 수렴’을 이유로 건립안 결정을 보류하면서 위안부 소녀상 건립은 사실상 장기 표류 위기에 내몰렸었다. 건립안건은 소녀상을 스트라스필드 광장에 설치할 수 있도록 시의회가 부지를 제공해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공공장소에 들어서는 조형물인 만큼 시의회의 인허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허가가 나온다는 것은 곧 시의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설치 장소를 제공해준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 위안부 소녀상 건립 좌초 특집 기사를 AFP통신의 욱일승천기 유료 사진과 함께 크게 다룬 호주동아일보 2014년 4월4일자 1면 PDF
  더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간 한인 여성들의 쓰라린 아픔을 위로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 세계적 움직임의 단초를 호주 쪽에서 제공한다는 각별한 뜻도 내포됐었다. 그러나 호주 시드니 한중 커뮤니티가 미흡한 사전 준비와 빈약한 논리로, 더 나아가 정세판단에도 뒤지면서 위안부 건립안은 조기 통과의 기회를 놓쳤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날 건립안이 시의회를 통과하지 못하면서 곳곳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옥상두 스트라스필드 부시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포기하기엔 이르다”면서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위해 더 많은 지지가 필요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니 한중연대는 올해 들어서도 소녀상 건립을 위한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허겸 재외동포신문 편집국장 (전 뉴시스 시드니 특파원, 전 호주동아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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