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수의 판화와 루쉰의 아포리즘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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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의 판화와 루쉰의 아포리즘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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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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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05-09-05 16:49]    
 
[오마이뉴스 정철용 기자]

1.내가 가지고 있는 국어사전은 '아포리즘(aphorism)'을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라고 정의하면서 '금언, 격언, 경구, 잠언 따위'가 이에 속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른다면 아포리즘은 두 가지 요건, 즉 내용에 있어서는 진정성을, 형식에 있어서는 간결성을 필수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 이런 요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아포리즘을 모은 책을 나는 그 동안 한 권도 만나지 못했다. 스무 살 무렵에 읽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잠언록 <고통의 이름으로 노래하라>는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철학적이어서 졸음이 쏟아졌다. 또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지나치게 명상적이고 초월적이어서 현실과의 관련성을 찾기 힘들었다.

이후 아포리즘을 모은 책들을 몇 권 더 들춰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포리즘'이니, '잠언집'이니, '명상집'이니 하는 부제가 붙은 책들을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서울의 지인(知人)이 새해 선물로 보내 준 여러 권의 책들 중에 루쉰(魯迅)의 아포리즘들을 모은 책 <희망은 길이다>가 끼어 있었다.

   
▲ 루쉰 아포리즘 <희망은 길이다> 표지
ⓒ2005 도서출판 예문
 그러나 루쉰의 작품이라고는 그 유명한 소설 <아Q정전>조차도 읽어보지 않았으니 그의 아포리즘을 모은 책에 선뜻 손이 갈 리가 없었다. <희망은 길이다>는 내 책꽂이에서 몇 달 동안 박대를 당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책들을 정리하다가 이 책의 제목 아래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어 표지를 넘겨보았다.

판화가 이철수가 쓴 서문이 눈에 들어오고 몇 쪽을 더 넘기니 친숙한 그의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힘차면서도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책제목 글씨도 사실은 이철수의 솜씨였음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판화가 이철수에 이끌려 나는 <희망은 길이다>를 펼쳐보게 되었다.

막상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숨을 데가 없습니다"라고 평하고 있는 이철수의 말대로 루쉰의 아포리즘들이 조준하는 탄환들은 내 가슴을 뚫고 들어와 속속들이 박혔다. "피로 쓴 문장은 없으리라. 글은 어차피 먹으로 쓴다. 피로 쓴 것은 핏자국일 뿐이다"라고 루쉰은 쓰고 있지만, 먹으로 쓴 그의 글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서 나는 여러 번 피를 흘려야 했다. 이 서평은 이를테면 그 핏자국인 셈이다.

2.나도 안다. 중국에서 나의 붓이 비교적 날카롭고, 말도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역시 알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공리니 정의니 하는 미명으로, 성인군자란 간판으로, 점잖고 성실한 체하는 가면으로, 유언비어와 여론이란 무기로,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 글로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칼도 없고 붓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못 쉬게 하는지를. 나에게 이 붓이 없었다면 수모를 받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깨어났다. 그러기에 늘 이 붓을 들어 기린의 피부 속에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고 있다.(148쪽, '내 붓이 날카로운 이유')

루쉰의 글이 날카로운 것은,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당대에 대한 대응의 한 방식으로 붓을 들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봉건주의와 서구 근대라는 이중의 억압 아래 놓여 있던 당시 중국의 현실과 중국인들의 정신을 개혁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붓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붓이 남긴 글들은 한 세기를 건너 뛰어 오늘날 우리 한국의 현실에도 적잖은 공감을 안겨주고 있으니 놀랍다. 예컨대, "먹으로 쓴 거짓이 피로 쓴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피의 빚은 반드시 같은 것으로 갚아야 한다. 그 빚은 갚음이 늦으면 늦을수록 이자가 크게 늘어나기 마련이다"와 같은 글을 읽으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최근에야 비로소 시작된 한국의 '과거사 정리'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통찰은 비단 아시아권에서만 머물고 있지 않다. 다음과 같은 글은 20세기말에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이른바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고 이름을 붙여 분류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당신은 국민입니다"이고, 하나는 "당신은 세계인입니다"이다. 전자는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이 망하게 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명에 위배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을 살펴보건대, 비록 일관된 주장은 없지만 모두 인간의 자아를 압살하고 획일화하여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대중들 속에 매몰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검은색으로 온갖 색깔을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92∼93쪽, '국민과 세계인')

또한 루쉰은 "J. S. 밀은 독재는 사람을 냉소자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제(共和制)가 사람을 침묵자로 만든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대중민주주의의 함정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릇 파수견(把守犬)이란 자본가 한 사람이 키웠더라도 실제로는 모든 자본가에게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부자를 만나면 누구에게나 꼬리를 치며, 가난뱅이에게는 누구이든 짖어댄다"라는 통렬한 비유로 자본에 길들여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세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과 기만을 단호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루쉰의 글들은 이철수의 판화와 상당히 닮음꼴이다. 루쉰의 글과 이철수의 판화가 시공간을 초월해 <희망은 길이다>라는 책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닮음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명암과 예각의 굵은 선으로 추악한 현실의 심장을 겨냥하는 이철수의 판화가 때로는 예상치 못한 부드러움과 깊이로 삶의 서정을 포착하고 인생의 지혜를 그려내는 것처럼 루쉰의 글에도 그런 부드러움과 깊이가 스며든 글이 여러 편 있다.

내 마음이 더 끌린 쪽은 바로 그런 글들이었는데, 특히 우리가 인생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 가지 난관을 갈림길과 막다른 길에 비유하고 있는 글에서는 루쉰의 호탕한 기개와 유머와 낙관주의가 가슴깊이 와 닿았다.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한 세상에는 막다른 길이란 없으리라.

인생이라는 기나긴 길을 갈 때 가장 쉽게 직면하는 것은 두 가지 난관이다. 그 하나는 기로에 섰을 때이다. 묵자는 통곡을 하고서 돌아섰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울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다. 먼저 갈림길 머리에 앉아 조금 쉬거나 한숨 잔다. 그런 뒤 갈 수 있어 보이는 길을 택해 간다. 만일 진실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의 먹을 것을 빼앗아 배고픔을 면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만나면 나무에 올라가 호랑이의 허기가 사라지고 지나간 뒤에 내려올 것이다. 가지 않으면 나는 나무 위에서 굶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끈으로 내 몸을 나무에 묶어 시체조차도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나무가 없으면 방법이 없다. 잡아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호랑이를 한번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 다음은 막다른 길이다. 완적(阮籍) 선생도 크게 울고 돌아섰다고 한다. 하지만 난 기로에 섰을 때처럼 계속 나아갈 것이다. 가시덤불 속을 한동안 걸을 것이다. 온통 가시밭이고 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그런 곳을 만난 적이 없다.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운이 좋아 만나지 못했거나. (24∼25쪽, '인생 기로에서의 선택')

3.이처럼 <희망은 길이다>에 소개되어 있는 루쉰의 글들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아포리즘'의 요건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서 읽기가 몹시 즐거웠다. 그의 아포리즘은 니체처럼 현학적이고 난해한 요설도, 지브란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도 아니었다. 루쉰은 삶에서 얻은 깊은 체험적 진리를 날카로운 통찰과 간명한 비유를 들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써 놓았다.

그런데도 그는 "내 글은 솟아난 것이 아니라 짜낸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한다. 듣는 사람들이 겸손하다고 오해하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진실일 터이다. 자신의 생애 전체를 우물 속에서 퍼내어 글이라는 두레박에 담아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려고 했던 그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글이 샘처럼 솟아 나오기만을 기다릴 수 있었겠는가!

루쉰의 다른 책들은 전혀 읽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이 책 <희망은 길이다> 한 권으로 그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다. 그는 말한다. "내 글을 편애하는 독자들은 가끔 내 글이 진실을 말한다고 평한다. 이런 과찬은 그들이 내 글을 편애하기에 나온 것이다"라고.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반대임을 분명히 말해 두어야겠다. 내가 그의 글을 편애하는 독자가 된 것은 그의 글이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다른 이들의 경우도 분명 나와 마찬가지리라. 그래서 아직 그의 글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나는 그 입문서로 <희망은 길이다>를 권한다. 그래서 루쉰의 글이 일부 독자들만이 편애하는 대상이 아니라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희망의 길'이 우리에게 더 빨리 놓일 수 있을 테니까.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22쪽, '희망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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