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북인사 사슬…38년만의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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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인사 사슬…38년만의 귀국
  • 한겨레
  • 승인 2005.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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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통일 앞장 선 이용씨

일본 유학중 5·16 규탄…5·17뒤 스웨덴서 ‘자주’ 발행
민주화·통일 앞장 선 이용씨 “반쪽 조국 여전히 아쉽다”

이창곤 기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던 반쪽 땅. 서른여덟 해가 덧없이 흘러갔다. 피끓는 젊은이는 반백의 노인이 됐지만 겨레는 여전히 둘로 나뉘어 있다. 그나마 고단한 이국생활을 함께 보낸 아내(노기여·61)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 비록 오랜만의 방문이라고 해도 어쩌면 허허롭고 쓸쓸한 길이었을지 모른다.
‘반체체 친북 인사’란 사슬에 묶여 오랫동안 국내 입국이 거부됐던 이용(70)씨가 고국에 돌와왔다. 1967년 이후 첫걸음이다. 14일부터 열린 ‘8·15 통일대축전’ 유럽공동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온 서울행이었다.

감회가 어떠시냐는 물음에 이씨는 “민족화해를 위한 축전에도 참가하고,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있게 돼 기쁘다”면서도 “여전히 반쪽 조국이란 게 아쉽다”고 말했다. 국민의 정부 이후 많은 ‘국외 망명객’들이 귀국했지만 이씨는 정부의 태도에 대한 불만, 국가보안법 등 여러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 입국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남쪽의 국가보안법으로 보면 내가 간첩일 수 있지만 도대체 가족이 있는 북한을 다녀온 게 간첩이라니”라며 당국의 ‘낙인’이 ‘가당찮다’는 태도를 나타냈다. 그는 이어 “북한을 다녀오고, <자주>란 잡지를 통해 국내 정권들을 비판해 온 것은 어디까지나 민족 자주와 화해, 통일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기실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이씨가 ‘반체제 친북인사’가 되기까지의 인생여정에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1·4 후퇴 때 살아남기 위해 내려온 남행길, 54년 부두노동자로 지내다 일본으로 밀항해 와세다대학교 대학생이 된 사연 등 ….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던 그의 삶의 전환점은 61년 5·16 군사 쿠데타였다. 당시 재일민단에 딸린 재일한국학생동맹에서 활동하던 그는 이 단체가 5·16 쿠데타를 비난하는 반군정 성명을 내는 데 앞장선다. 이 일로 그는 일본 체류는 물론 한국 귀환도 어려워지면서 결국 70년 스웨덴으로 가게 됐다.

스웨덴의 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조용히 지내던 그를 ‘자극’한 또다른 사건은 80년 5·17 쿠데타. 이 사건을 접한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해 81년 6월 <자주 designtimesp=15987>라는 이름의 부정기 간행물을 발간하게 된다. 이씨가 스웨덴에서 가져와 내보이는 창간호를 보니 광주항쟁 관련 사진과 함께 “우리 민족 생존의 필수조건은 반공안보가 아니라 민족단합이며 자주적 평화통일이다”란 글이 또렷이 적혀 있다.

이 잡지는 국내 언론이 제구실을 못할 때 유럽 등 재외동포 사회에서 ‘한국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기록’ 구실을 톡톡히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재정난으로 지난 98년 지령 96호를 마지막으로 정간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는 잡지 발간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등지로 다닌 일이며, 젖먹이를 내팽개쳐 놓고 아내가 어깨가 빠지도록 밤새도록 타자기를 두드리며 고생했던 일화 등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때 이씨의 입국불허에는 이런 출판활동말고도 그의 장인이 총련 부의장까지 지낸 인물이란 점과 몇차례의 북한 방문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남한의 현실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북한 당국에 대해서도 “99년 유럽 범민련 인사들과 함께 방문했을 때 북쪽 당국이 누나와 동생가족을 만나도록 해주지 않아 매우 서운했다”며 남북 두루 실망스럽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씨는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는 아내와 함께 현재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70km 떨어진 인구 18만의 작은 도시 웁살라에서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기사등록 : 2005-08-14 오후 07:35:01기사수정 : 2005-08-15 오후 03: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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