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안팎 한국기록문화상’ 수상작 / 중앙 아시아 고려인 140년 삶의 편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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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안팎 한국기록문화상’ 수상작 / 중앙 아시아 고려인 140년 삶의 편린들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04.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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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예외없이 모든 고려인들의 가족사는 직접, 간접적으로 항일운동, 소비에트 혁명과 내전의 슬픔과 기쁨은 크든 작든 거대한 역사의 토대이며 도정이고 이정표다. 고려인들이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증거물들이다.


어느 고려인은 거의 1백 여년 전에 한국에서 찍은 외고조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의 증조부는 자신의 가족 사진을 가지고 1910년대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그의 자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서 수 만 명의 다른 고려인들과 함께 갑작스럽게 기차에 실려 중앙 아시아로 이주해 오면서도 사진과 족보를 간직했다.


이 가보는 다시 아들과 그 아들에게 전해졌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과 수 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공간의 거리, 그리고 소수의 지도자들이 내린 정치적 결정과 수천만 평민들이 감당해야 했던 역사의 무게가 그 사진 한 장 속에 실려 있었다. 오래된 할아버지의 사진과 증명서들, 거기에 다시 새로운 역사를 담는 현대 고려인들의 가족 앨범은 개인사적 가치를 훨씬 뛰어 넘는다.


불행히도 고려인들에게 오래된 가족 앨범은 흔치 않다. 오히려 대단히 드물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고려인들이 극동의 터전을 버리고 중앙 아시아로 쫓겨가야 했던 이유는 일제의 스파이라는 오명이었다. 조선과 관련된 사진도, 조선말도, 조선의 책도, 그들이 사용하던 옛 물건들도 대단히 위험한 정치적 덫이 될 수 있었다.


많은 사료들이 그때 소실되었다. 사진들이 사라진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국인들은 고인과 함께 그 유물들을 태우는 관습이 있다.


한 개인의 죽음과 함께 그 개인이 연루되었던 역사가 송두리째 재로 화해 버리는 것이다. 소비에트 체제의 강압적인 결정에 따라, 또 한국인 특유의 관습에 따라 고려인들 역사의 많은 부분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이든 1, 2세대 고려인 노인들이 돌아가시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의 가교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간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인들과 관련된 공식적 기관들 뿐 아니라 거의 드물지만 사료 수집 활동을 하는 개인들이 있다.

최 아리따 바실리예브나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최 아리따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대학에서도 사학을 전공했다. 카자흐스탄의 기록보존소에서 일한 경력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최 아리따는 평생 동안 한국사 관련 자료를 수집해 왔다.


그녀가 수집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극동 지방에서 정교회 신부였다는 할아버지의 교회를 찾으면서부터였다. 최 아리따는 나이든 노인들을 모아 텅 빈 역사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알마티에서 노인회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강제 이주에 대한 복권 운동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최 아리따는 재로 화해버릴지도 모르는 사진들과 증명서, 유품 등을 모았다. 2004년 1월 필자는 알마티에서 우연히 최 아리따를 만났다. 그녀의 집은 사진들과 문서들로 가득 쌓여 있는 거대한 시간의 창고였다. 


연구 여행은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고 어떻게 그 많은 구슬을 꿰야 할지 몰라 겨울에는 원본들의 디지털 촬영만으로 작업을 끝냈다. 그리고 이번 여름 다시 그 사진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기 위해 알마티로 떠났다.  이 앨범은 고려인들에 대한 백과사전도, 심도있는 연구서도 아니다. 또한 독립 운동이나 콜호즈, 시월 혁명 혹은 사회주의의 영웅 같은 심각한 주제들을 앞으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필자는 이 사진들을 고려인들의 가족 앨범으로 꾸며보았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시각이 아니라 내가 우연히 만난 평범한 개인의 삶을 통해서 특별한 역사를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방울의 물이 대양을 비추듯 한 장의 사진은 역사를 반영한다.


색이 바래고 귀퉁이가 찢겨 나간 이 사진들이 기나긴 침묵을 깨고 크고 작은 진실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면 역사가에게 그 이상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이혜승 (편집위원 . 한국외국어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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