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이민 100주년기념 이민사 발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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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이민 100주년기념 이민사 발굴 시리즈>
  • 재외동포신문
  • 승인 2004.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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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 이민사: 초기 인맥을 찾아서...

  미주한인 이민사 100년을 맞아 191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초창기 시카고 한인 이민사의 뿌리를 찾아내는 일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수십년전의 장고한 이민 역사를 면밀히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문헌상의 기록과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취재의 틀을 잡았다.

특히 시카고 최초의 한인교회가 발간한 '칠십년사'에 기록된 초창기 한인사회 태동모습과 주요 인물들을 바탕으로 주요 이민사의 흐름을 시대별로 정리했다. 선조들의 소중한 이민사가 이땅에 살아가는 코리안아메리칸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되길 기대하면서.... <편집자>

시카고 초기 한인 여행자와 1910년대 거주실태

 시카고에 최초로 발을 딛은 한국인은 유학생 서재필로 알려져 있다. 유길준에 이어 개화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 한 서재필은 '갑신정변' 다음해인 1885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대령의 딸과 결혼하여 시카고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에 이어서 윤치호가 1893년 8월에 시카고에서 개최되었던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차 왔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같은해인 1893년 봄부터 약 반년동안 시카고에서 세계 무역박람회(World Fair)가 열렸는데 그때에도 한국인 방문자들이 왔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연방 인구 조사 보고서에는 1910년까지 시카고지역에 한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920년 인구조사에는 약 30명의 한인이 시카고에 거주한 것으로 집계돼 있다. 1930년에도 일리노이의 총 한인인구가 100명이 못되었던 것으로 인구 조사국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연방 인구조사에 응하기에 떳떳한 법적 신분을 갖지 못해서 통계에 누락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이 지역 한인 실세가 상당히 약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0-1920년 시카고에 거류했던 한인들의 거주형태를 보면 하와이 농장 이민을 거쳤거나 유학생으로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들 가운데 시카고에서 가장 오래된 인물들로 사업가 강영소 형제들과 식당업으로 돈을 모은 김경이 꼽혔고 박필, 정태은, 오한수, 김홍기, 조종진, 황휘등이 있었다. 유학생으로는 염광섭, 황창하, 현정염, 김여택등 10여명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김경은 1912년경 시카고에 왔을 것으로 추정하여 시카고 정착한인 제1번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민병용저 <미주이민 1백년>에 나온 방사겸옹의 회고를 추적하면 방사겸이 1907년 이전에 시카고에서 1년간 쿡으로 일하다가 위튼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알수 있어 방사겸이 시카고 첫 번째의 거류한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방사겸은 독립운동 기금을 마련한다고 인삼장사를 하면서 떠돌았기 때문에 시카고 지역 한인사회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시카고에서 한인들의 모임이 어떤 형태로든지 태동될 수 있었던 가장 이른시기인 1917년의 시카고시 전화번호부(Chicago City Directory)에는 '코리안'으로 된 단체 이름은 전혀 없으며 개인이름으로는 김씨성이 3명이 나타난다.

그 중에 하나가 다운타운에서 김경이 운영하던 식당으로 추정되는 이름으로서 전화부에 'Kim, King:B. Manager'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1917년에 김경이 식당을 소유하지는 못하고 비즈니스 매니저로 일했던 것으로 추정케 한다. 그외에는 조셉김과 페리 김이라는 공사계약업자(Contractor)의 자택번호가 1917년에 등재됐다.

1923년 시카고 전화부에 김씨는 5인이 등재됐는데 김경은 1917년 매니저로 있던 '버나드 레스토랑'의 주인으로 됐고 남쪽에 식당을 가진 또 다른 김씨(Kim Sung W.)가 있었다.  그 외에 요리사로 일하던 2인의 김씨(Kim D.O., Kim K.C.)와 한 여성(Kim Naomi)이 있었는데 '김씨 표본이론'을 적용하면 1923년에 시카고에서 전화번호를 가질정도로 정착된 한인은 25인 정도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시카고 최초 한인학생회와 1920년대 유학생 활동

 중서부 한인유학생회로는 네브라스카주 헤스팅스에서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사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1913년 6월 4일 조직한 유학생회가 최초의 미국내 한인학생회였다. 학생들간의 연락과 친목 및 학술지식 교환을 목적으로 조직된 네브라스카의 첫 한인 학생회에 이어 곳곳에서 학생회가 조직 되었는데 시카고에서 최초의 한인학생회는 1918년 10월 8일 조직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앞서 1913년 12월에 시카고에도 흥사단 지부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흥사단 시카고지부가 시카고 최초의 한인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19년 9월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러지역 학생대표들이 모여 전 미국 한인학생회 연합조직 결성에 합의했으며 시카고에서는 강영승, 양면진, 현승염, 현정염등 4인이 지역대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북미유학생 총회의 정식 결성대회는 1921년 4월30일 뉴욕에서 열렸으며 회장에 리용직, 부회장에 조병옥이 선임됐다. 1923년 학생회 총회 본부를 교통의 중간지점인 시카고로 이전했고 이때 회장은 시카고 출신의 염광섭, 부회장은 황창하가 맡았다.

그로부터 1년후 시카고대학에서 전 북미 한인학생 연합회 연차 총회가 열렸으며 이때 조국의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에 관한 토론, 그해 5월 연방 입법화된 동양인 이민 금지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서부지역 광산참사에 희생된 동포 노동자의 문제등을 토론했다. 1927년 '북미 대한인 유학생회'로 변경한 이 조직은 회원 255명을 두었으며 1945년 조국의 광복시까지 24년간 존속하다가 인계가가 없이 해체되었다. 한편 1926년 시카고 랜드 맥 넬리 지도회사에 근무하던 청년 송기주가 한글타자기를 발명해 당시 큰 뉴스거리가 됐다.
 
시카고 최초 한인교회와 1930년대 한인사회

 시카고 최초의 한인교회는 설립과정과 시기에 대해 다소 상이한 고증들이 있지만 1923년 9월 창립된 감리교회가 최초의 한인교회로 공식화 돼 있다. 시카고에서 유학생과 거류민들을 포함하는 첫 공식모임의 시작인 감리교회의 태동은 1919년 조국의 3.1 운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용 저 <미주한인 50년사>에 따르면 1924년 강영소와 김경, 박장순, 차의석, 김원용, 조희렴, 염광섭등의 발기로 시카고에 한인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링컨' 애비뉴에 있는 미국인 교회 지하실을 예배당으로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7년 이 교회는 '레익팍' 애비뉴로 정식 예배장소를 옮겼으며 이것이 최초의 한인사회 봉사센터이자 기도처였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 교회안에 조직된 학생회는 훗날 시카고 한인회의 시초가 된다.

 1930년대 시카고 한인사회 거주실태에 대해 한인감리교회 4대 담임목사였던 갈홍기 박사는 "한국인의 화와이 이민이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압력에 따라 중단되기까지 약 7천4백명이 도착했는데 그 중에서 1920년대 후기부터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화와이 이민중 60-70명이 시카고 부근에 옮겨와 당시 그 가족수가 150명에 이르렀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또 "1922년 일제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책' 시행으로 유학이 허락되어 도미해 온 '신도 유학생' 50여명을 합치면 약 2백명의 한인이 시카고와 인근지역에 거류했다고 볼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1930년 연방 인구보고서에는 일리노이의 한인이 모두 76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중 시카고 시내에 64명이 살았던 것으로 파악돼 있다. 이들은 주로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주된 활동영역을 가졌으며 당시 유학생 대부분은 법적으로 취업이 엄격히 금해져 교포가 경영하는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고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경, 강영소 형제, 천세헌, 박필등이 경영하던 식당에서는 유학생들이 수시로 요리사, 웨이터, 잡역등에 일자리를 제공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한인 식당업 개척자들의 영향을 받아 최세창, 한장호, 임초등도 잇따라 시카고에서 식당업을 경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대 시카고 한인들의 직업적 특징은 자영사업과 카페테리아, 주방장, 요리사, 호텔 헬퍼 직종에 취업한 한인들이 많았고 흥사단 단원들은 음식점및 식품점을 주로 경영하면서 자급자족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갈홍기 박사는 "당시 교회는 교포의 취직 및 정보교환의 중심이었으며 교회에 별도로 학생관, 교육관등의 독립시설이 없었으나 실제로 교회 전체가 시카고 및 인근에 거주하는 교포들과 학생들의 정신 및 생활의 중심지였다."고 밝혔다.


 1930년대 시카고에 거주했거나 유학했던 한인인사들로는 ▲학계진출자: 김활란(이화대학 총장), 고황경(서울여대 창설자), 고봉경 자매, 윤일선(서울대 총장), 김영선(생물학 박사), 김보린(한국 감리교 신학교수), 정보라(초대 시카고 한인회장, 시카고 명예영사, 치과의사) 김제식(이대교수) ▲정치행정계 진출자: 김능진(군정시대 경무과 수사과장), 이훈(농림장관), 황성수(목사, 국회 부의장), 조병옥(정치가) ▲음악가: 홍난파(작곡가), 윤심덕, 한인성, 이유선(성악가), 곽상수(작곡가), 곽정순(바이얼니스트), 곽정선(첼리스트), 조태권(지휘자), 윤종선(테너 성악가) ▲기타: 임창모(1937년 시카고 IIT유학), 제임스 이(한인 최초로 시카고시내에 도박장 창설), 한장호(식당업), 임초(식당업)등이 전해지고 있다.
  
 전쟁과 이민 침체기 1940년대-50년대

 1930년대에 서서히 자란 시카고 한인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다시 침체하게 됐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서 새 유학생이 전혀 안 온데다가 가족을 가진 사람들은 재미 일본인들이 집단 수용소로 가면서 남긴 일자리를 얻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한인감리교회 6대 담임이었던 이은택 목사에 따르면 "2차대전중에 학생들이 모두 통역병으로 뽑혀 갔기 때문에 80여명의 교인중 10명도 채 안되는 숫자가 예배를 드리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2차대전때 일본인 배척 때문에 동양인들이 모조리 수난을 당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백인들에게 매를 맞고 상점 주인들은 한인들의 출입을 금하기도 했다. 1942년 외국인 자산 동결령으로 한인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됐으며 일본인들을 오하이오주 집단 수용소로 보낼 때 한인들이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당시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오해받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한인이다(I am a Korean)'라는 표식을 달고 다니면서 일본인으로 봉변당하는 일을 막을수 있었다.
 
1945년 이전 시카고 한인들은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어 신분이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민국 수사관들이 수시로 불심검문을 갖고 문제 한인들을 연행해 갔으며 불법체류자로 적발되면 무조건 강제송환 시키는 상황이었다. 일부 한인들은 생활고와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1950년 6.25 한국전 발발은 시카고에도 큰 충격을 가져왔다. 전쟁소식이 신문과 방송으로 전해지자 전 지역의 시카고 한인들이 예배당에 가득하게 모여서 조국을 염려하는 눈물의 기도를 하며 한편으로는 통일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그 방안을 토론했다.


그리고 피난민들을 위해 전쟁 구호품 모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본국에 전달하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한인들과 유학생들은 가족 생활이 어렵고 거의 고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 친구나 다른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구호품을 수집해 보내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4년후인 1954년 한인 학생회 주최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많은 한인들이 모였는데 당시 시카고 인근 유학생수가 모두 약 2백명이 된다고 학생회측은 기록했다.
 
시카고 한인회 출범과 1960년대 한인사회

  1960년대 들어서 한인감리교회 산하조직으로 활동하던 시카고 한인학생회가 독립적인 단체로 주체성을 찾기 시작하다가 한인회로 변신하여 독립해 나갔다. 당시 학생회 회장이었던 심기영씨는 학생회와 감리교회는 40년간 운명을 같이해 온 밀접한 관계이지만 학생회는 독립단체임이 헌장에 명시돼 있는만큼 교회와의 관계를 선명하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와 함께 당시 주요행사를 할 때나 대외관계에서 과거의 이승만박사 지지측과 그에 반대하는 측이 갈등을 겪는등 한인사회의 분파요소를 통합할 목적과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시카고 한인들을 대외적으로 대표하기 위해 시카고 한인회가 마침내 발족했다.


 1963년 1월3일 한인감리교회에서 한인회 창립총회를 갖고 최다수 득점자인 손원태 박사를 초대 이사장에 선출하고 초대회장에는 정보라 박사를 선출했다. 이어 1964년 1월에는 제2대 시카고 한인회장으로 김봉오 박사를 선출했으며 1965년에는 다시 정보라 박사가 한인회장을 맡아 초창기 한인회 창립기를 주도해 나갔다.


 초대 한인회장 정보라 박사는 1963년 시카고 네이비 피어에서 열린 국제 민속제(International Folk Festival)에 처음으로 참가해 대외적으로 한인회가 시카고 한인사회 대표적인 단체라는 상징적 행사를 했다. 그후 1970년대까지 한인회는 이 국제 민속제에 참가해 한국의 민속품을 전시하고 불고기와 만두등 한국음식을 판매하며 고유무용을 선보이는등 주류사회를 향해 한국을 알리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됐다.


이 민속제는 1980년대에 제인버언 시장이 음식축제 ‘테이스트 오브 시카고(Taste of Chicago)로 변경함으로써 한인회의 참여가 중단됐다.


 한편 1964년에는 감리교회내 장로교인들을 주축으로 시카고 두 번째 한인교회가 세워졌다. 당시 기록에 보면 감리교회내 주요인물이었던 김봉오 직원회장, 직원회 서기 장시근, 부인회장 애나 하, 청장년 회장겸 성가대장 이경화, 재정, 탁사위원 유기진등이 이종욱 목사와 함께 분리하여 1964년 4월5일 시카고 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한 것으로 전해졌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카고 한인교회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1966년말 발간된 시카고 한인회 주소록에는 5개의 한인교회(한인감리교회(은준관목사), 한인 장로교회(임옥목사),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김윤국목사), 한인복음교회(방지형목사), 부에나 기념장로교회한인회중(이영재목사))와 1개의 선교센터(한인선교전도센터(강 스테판목사))등 총6개의 기독단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후 5년이 지나서 1971년 5월에 발행된 시카고 한인회 주소록에는 교회 및 선교센터가 15개로 증가했다.  


  1965년 동양인들의 이민이 허용되고 이미 입국해 있던 사람도 자격이 갖춰지면 영주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내용의 개정 이민법이 전격 시행되면서 한인사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맞게됐다. 1960년대 연방 인구조사에는 시카고 한인수가 297명으로 집계됐는데 1970년도에는 1,666명으로 집계됐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특히 당시 인구조사에 응하지 않은 유동인구 유학생들을 합치면 70년도의 시카고 한인인구는 인구보고서의 숫자보다 2-3배이상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시카고 총영사관 최남준 영사가 발표한 시카고 한인인구실태 자료에 따르면 1969년 이민국 통계를 기준하여 시카고에 2,200명의 한인이 있다고 발표됐으며 이중 영주권자가 966명, 시민권자가 200여명, 일반 체류자 881명, 유학생139명으로 총 한인수가 1968년보다 586명이 증가했다고 기록됐다.


 1960년대 후반에는 이민보다도 유학생 숫자가 급증했는데 그 이유는 1961년이후 한국정보가 유학을 개방하여 문교부 시험을 거친 학생들이 대거 미국유학을 오게 된 것이 주 원인이었다. 또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국에서 의사,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의료직 전문요원들이 1965년 이후 대거 미국에 고용이주함으로써 시카고 한인사회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봉급자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5년이후 대량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형태의 특징은 지리적으로 주거지는 분산되면서 사회적으로는 한인교회와 한인단체들을 중심으로 강한 유대를 형성해 왔다는 것이다. 주거지가 분산된 요인으로는 유학생들이 캠퍼스 주변으로, 의료 전문인들은 병원시설부근 또는 병원측이 제공하는 숙소로 거주지를 정하는 한편 그 외의 이민자들은 아파트 임대료가 낮은 근로층 주택지 또는 정부 조보금으로 운영되는 고층 공영 주택단지에 입주했기 때문이다.


 정착초기 수년후 근로층 주택가나 공영 아파트의 환경과 부근 공립하교의 상태가 퇴락함에  따라 대부분의 한인들은 환경과 학교가 더 좋은 백인지역으로 이주해 나갔고 동족간의 인접 거주문제를 염두해 두지않은 대신 교회등을 통한 주말의 사회적 유대로 대치했기 때문에 지리적 한인 '겟토'보다는 주말의 사회적 '겟토'형성으로 더 강하게 진행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박신규기자<skpark@koreadail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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